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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순 Aug 08. 2024

Re: View 05. 맥베스

맥베스는 옛날 사람이다



패러디 뮤지컬 <썸씽로튼>을 제외하고 셰익스피어 작품을 제대로 본 적이 없는데, 처음으로 <맥베스>를 관람했다. 원작은 말할 것도 없이 훌륭했지만, 같은 텍스트여도 연출에 따라 달라지기에 기회가 될 때마다 버전 별로 후기를 남겨 보려고 한다. 첫 번째 주자는 2024 맥베스 양정웅 연출님이다.


객석등이 꺼지기 전, 까마귀 떼를 손으로 들고 흔드는 오프닝 연출을 보고 아날로그적인 맥베스가 진행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결론적으로는 아니었다. 까마귀 스틱이 황정민 배우 아이디어라는 건 나중에 알았다. 양정웅 연출은 예상과 정반대로 현대적인 요소를 잘 쓰는 타입이셨다. 호불호를 떠나서 색다른 경험이긴 했다.




극장을 나서는 길 괜히 한 번 더 생각났던 요소가 몇 가지 있다. 첫 번째는 직관적인 조명의 사용.


보기만 해도 빌런을 의미하는 것 같은 초록 빛은 역시나 계략을 꾸미는 인물을 비출 때 쓰였고, 빨간 빛은 죽음으로, 흰 조명은 인물의 사실적인 면모를 드러내려는 것으로 느껴졌다. 덩컨을 비출 때는 권력이, 맥베스를 비출 때는 욕망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는 것처럼. 넓게 보면 무대의 영역과도 연관이 있는데, 초반부 덩컨이 왕의 위치를 나타내는 2층 세트에 설 때는 무대 조명에 객석등까지 환하게 켜져 있어 극장 전체가 그의 영역으로 보인다. 덩컨이 높은 위치에 머무르면서 모든 인물을 내려다보는 데다가, 모든 공간에 밝은 조명이 켜져 있어 양옆앞뒤 전 구역이 덩컨의 지휘 아래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맥베스가 왕위를 찬탈한 후에는 흰 조명이 2층 세트 밖으로 확장되지 않고 협소하게 맥베스 발 아래만을 비춘다. 그 때문에 정세를 아우르는 왕이 아니라 내적 욕망과 사리사욕에 매몰된 왕으로 보인다.


이는 무대 세트에서도 볼 수 있는데, 맥베스 왕이 처음으로 주최한 만찬에서 하수 방향 사선으로 커다란 테이블이 길게 늘어질 때 갑자기 공간이 확장되어 보인다. 무대를 크게 가로지르는 만찬 테이블이 강제로 찬탈한 맥베스 권위의 한계로 보였다. 맬컴이 맥베스를 칠 때도 마찬가지인데, 부하들이 방패를 앞세워 사선으로 길게 서는 동선이 만찬 테이블과 동일시 되어 보인다. 오버띵킹일 수도 있지만 완력으로 왕위를 가진 이들의 한계가 아닐까 생각한다.


출처: KBS 연예

이러한 동일시는 대관식에서도 보인다. 맥베스에게 왕관을 씌워 주는 인물은 레이디맥베스인데, 순순히 넘기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신이 왕관을 쓸 것처럼 머리 위로 높게 들어 멈추었다가 맥베스에게 씌워 주며 야욕을 드러낸다. 이때 위치는 레이디맥베스 → 맥베스이다.


마지막 장면, 맥베스를 죽인 맬컴이 왕관을 뺏었을 때도 맬컴 → 맥더프 사이에서 비슷한 액팅이 반복된다. 맬컴은 레이디맥베스가 서 있던 곳에서 왕관을 높이 들었다가 자신의 머리에 쓴다. 맥베스에게 왕관을 넘겨야만 했던 레이디맥베스와 달리 맬컴은 권력을 차지할 수 있는 인물이고, 맥베스의 왕좌가 있었던 자리에는 새로운 왕 앞에 무릎을 꿇고 충성을 표하는 맥더프가 있다. 맥더프처럼 왕권 앞에 충성해야 하는 맥베스가 과분한 자리에 앉았었다는 걸 다시 한 번 상기시키는 장면이다.


그 외에도 바람을 부는 마녀들이 줄 소품을 이용해서 마법진 별을 만드는 연출이나, 뱅코우의 아들이 뱅코우-맥베스 뒤에서 왕관을 쓰고 혼자 칼싸움을 하는 의미심장한 삼자대면 동선 등 줄거리를 서포트하는 요소가 많아서 고전임에도 잘 따라갈 수 있었다.


출처: 공식 포스터


모든 걸 통틀어서 가장 좋았던 건 김소진 배우의 미친 열연이다. 레이디맥베스가 등장하면 숨쉬는 것도 잊고 몰입할 만큼. 그중에서도 배우의 연기로 유독 찝혔던 부분이 있는데, 못하겠다고 우는소리하는 맥베스의 손을 가슴으로 확 끌어 오는 장면이다. “아기에게 젖을 물려 본 적이 있어요. 젖을 문 아기의 얼굴은 정말 사랑스럽죠. 그렇지만 필요하다면 그 머리통을 산산조각 낼 수 있어요.” 이전까지 큰 액션이 없다가 갑자기 강세를 줘서 레이디맥베스의 욕망이 드러나는 중요한 대사를 더 깊이 담을 수 있었다. 완벽한 호흡과 완급 조절을 해내는 배우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연을 보다 보면 가끔 “……”가 튀어나와서 짜치는 경우가 있다. 침묵조차 연기로 채울 수 있는 배우를 자주 보긴 힘들다. 특히 영상매체가 익숙한 배우일수록 무대 위에서는 마가 뜨거나 공간에 비해 아우라가 부족해 어색하다는 느낌을 받는데, 이토록 완벽하게 관객을 제압하는 레이디맥베스라니…. 연극 이런 거지 외치면서 호들갑 떨 수 있는 배우를 만나서 기뻤다!


전반적으로 재미있게 본 건 맞지만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들도 있었다. 극에서 영상 통화도 하고 게임기도 만지고 총도 쓰고 적외선 캠도 보여 주는데 그럴 때마다 튕겨져 나왔다. 후에 연출님 인터뷰를 찾아 보니 맥베스는 현대와도 맞물려 있는 인물이기 때문에 다채로운 요소를 섞어 쓰셨다고 한다. 멋있는 해석이지만, 주관적으로 셰익스피어의 고전적인 말 맛과 현대 요소가 잘 어우러진다는 느낌은 못 받았다.


마지막으로 마녀 3인방 배우들, ‘녀’자가 들어가는 만큼 여자 배우들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남자 배우로 구성되어 있어서 당황했다. 수염이 있고 중성적인 모습을 했다고 굳이 남자 배우를 캐스팅할 이유가 없어 보였다. 처음에는 그 선택에 합당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끝까지 본 결과 극적인 의도를 캐치를 못한 건지… 모르겠다.


셰익스피어 <맥베스>, 텍스트 자체만으로 사람 홀리는 힘이 있다. 임성한 김은숙이 없던 시절 가장 큰 도파민을 선사할 수 있는 브랜드는 아마 셰익스피어였던 것 같다. 어쩌면 지금까지도!


그렇지만 옛날 사람이 영통을 하는 건 좀 이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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