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이어, 너 말고 차라리 날 죽여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2024년에 살고 있는 한국 국적의 20대 여성인 본인이 <엔젤스 인 아메리카>에서 어떤 동시대성을 가지고 어떤 컨텍스트를 읽어 내야 하는가?
<맥베스>가 고전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상연되는 것은 그의 모습이 인간의 근본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권력을 좇는 인간, 악한 인간, 나약한 인간, 욕망하는 인간, 욕망 때문에 몰락하는 인간. 여전히 많은 콘텐츠에서 다루고 있는 포괄적인 상이다. 연극이 가질 수 있는 최대의 동시대성인 것이다.
반면에 <엔젤스 인 아메리카>는 어떤가. 제목에서부터 ‘미국’이라는 단어가 눈에 띈다. 아무 정보 없이 극장에 도착하고 나서야 일행에게 주인공이 에이즈 환자라는 말을 들었다. 에이즈와 천사와 미국, 정말로 미국스러운 조합이라고 생각하는 도중 막이 올랐다. 객석등이 꺼지기도 전에 늙은 유대교 랍비가 걸어나와 말을 걸었다. 어느 유대인 할머니의 장례식장이었다.
“여러분이 밟고 있는 이 땅, 여러분이 마시고 있는 이 공기, 이것은 미국의 것이 아닙니다. 어느 동유럽의 넓은 초원에서 온 것입니다. 어느 유대인이 등에 짊어지고 온 것들을 그녀의 자손들에게 심어 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옛것이 죽는 시대입니다. 이제 옛것은 하나도 남지 않겠지요.”
미국을 배경으로 하는 연극으로 이보다 완벽한 오프닝은 없을 것이다. 기대감을 한껏 높인 연설 다음부터는 카톨릭교, 몰몬교, 유대교, 에이즈 환자인 동성애자 남성이 등장해 각자 처해 있는 상황을 보여 준다. 각양각색의 종교인이 등장하는 만큼 보수적인 1985년 미국에서 이들의 입지, 해당 인물들이 동성애자라는 사실로 인해 발생하는 종교적, 인간적 갈등이 이 극의 주요 쟁점일 거라고 생각했다. 1막에서는 그런 맥락으로 출발한 대사들이 유독 귀에 남기도 했다.
#1.
1막 초반부, 에이즈에 걸린 애인을 두고 떠나기 전 죄의식에 몸부림치는 남자에게 유대교 랍비는 이렇게 말한다.
“그거 참 안됐구먼. 카톨릭은 용서를 믿지만, 유대교는 죄를 믿는다네.”
평생 도덕적 딜레마를 겪어 온 인물이 죄를 믿는 유대교도라는 것이 흥미로웠다. 랍비의 대사로 인해, 이 인물이 죽음을 목전에 둔 애인에게 돌아갈 것인지 아닐 것인지 다음 스텝이 더 궁금해지기도 했다. 카톨릭교나 몰몬교에게도 이렇게 종교적으로 인물의 레이어를 더해 줄 대사가 등장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1막 이후로는 기억이 없다. 첫공 페어의 방랑에 헤매느라 제대로 듣지도 못했다.
#2.
1막 마지막, 변호사 로이가 자신이 에이즈에 걸렸음을 알게 된 후 의사에게 뱉는 대사에서는 작가가 텍스트 밖으로 빠져나와 말을 거는 기분을 느꼈다.
“자, 그럼 이제 내게 뭐라고 할 거지? 흐, 로 시작하는 말. 해 봐. 흐, 로 시작하는 말. 자, 이제 내게 호모라고 할 건가?”
“에이즈는 동성애자나 걸리는 병이야. 동성애자가 뭘 의미하는지 아나? 게이? 레즈비언? 아니, 동성애자는 여지껏 차별금지법도 통과시키지 못할 만큼 존재감 없고 약한 인간들이라는 뜻이야. 고로 난 동성애자가 아니야. 난 영향력이 있거든. 내가 숫자 열 개를 누르면 이 나라에서 제일 영향력 있는 사람이 응답할 거야. 누군지 아나? (”대통령.”) 아니. 영부인.”
“그러니까 난 심심풀이로 남자들과 섹스하는 이성애자야. 알아듣겠나? 자, 그럼 이제 내게 뭐라고 할 건가? 에이즈에 걸렸다고 할 건가? 아니. 난 암이야. 간암이라고 해 두지.”
성공한 변호사이자 백인 남성인 로이는 1985년의 미국을 대변하는 인물이자 에이즈에 걸린 동성애자다. 1막 마지막을 보고, 로이의 양면성이 결국에는 마초 문화를 깨부수는 기제로 작동할 줄 알았다. 그게 작가가 원하는 바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로이는 파트 원 내내 센 척하며 거들먹거리기만 할 뿐이다. 죽어가면서까지.
다른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보수적인 사회에서 정체성을 숨겨 왔던 게이가 끝끝내 엄마에게 커밍아웃하고, 에이즈에 걸린 애인을 외면하고 싶었던 유대교도가 결국 진심을 터뜨리며 맹렬히 싸우기도 하지만, 거기까지다. 전체적인 맥락에서의 인물들이 뜻하는 욕망과 의도를 난 읽어내지 못했다. 파트 투를 보기 전까지는 어떤 전개가 이어질지 알 수 없겠지만, 파트 원에서 뭘 알아들어야 다음도 기대하지 않겠는가.
엔젤스 인 아메리카의 초연은 1991년도다. 인물들은 시종일관 레이건에 대해서 떠들고 공화당과 좌파와 인종차별에 대해 연설한다. 에이즈 환자는 죽음의 냄새에 몸서리치고 있으며 모든 인물이 다가오는 밀레니얼을 두려워하고 있다. 극중 인물은 1985년을 살면서도 “세상이 나이를 너무 많이 먹었어.”라고 하지만, 지금은 밀레니얼을 맞이하고도 강산이 2번 반이나 바뀐 2024년인데다가 장소도 한국의 서울이다. 물론 40년 전 미국 사회와 지금의 한국 사회를 비교했을 때 별다를 게 없을 만큼 서울은 보수적인 공간이다. 그나마도 다른 지역에 비해서 진보적일 정도로 한국은 보수적인 나라다. 분명 비교에서 오는 사유가 있지만, 그게 끝이라면 이 연극은 맥베스와 달리 동시대성의 한계를 지닌 것이다.
레이건, 공화당, 2000년. 2024년을 살고 있는 한국 사람이 이 키워드에서 무엇을 읽어내야 하는가. 다른 인물들은 이해한다치더라도 하퍼와 프라이어 조상 귀신들의 존재 의의에 대해서는 여전히 종잡을 수가 없다. (미국은 제사도 안 지내잖아) 너무나 다른 사회문화적 맥락을 지닌 이 극에서 한국인이 삶의 본질을 찾을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 이래서 해밀턴이 아직까지 못 오는 건가?
<렌트>의 연극 버전 같은 <엔젤스 인 아메리카>. 렌트는 퍼포먼스와 앙상블의 합일이 있기에 충분히 통쾌하고 재미있는 극이다. 그러나 엔인아는 미사여구만 가득한 끝나지 않는 논의를 보는 기분이었다. 난 한국 사람이고 이 연극이 왜 한국에 들어왔는지 의문스럽기 그지없다. (흥선대원군 안 좋아합니다)
엔젤스 인 아메리카 파트 투, 보지 않을 것이다. 죽어도.
호불호와 별개로 전국향 배우의 호연에는 기립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