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발행
1. 의[衣]
의류 치수에는 ‘기준선’이 있다. 국가기술표준원은 한국인의 평균 신체를 조사해 한국 산업 표준 규격(KS)을 제시한다. 하지만 시중에서 판매되는 대부분의 옷은 규격을 크게 벗어나 있다. 프리사이즈에 대한 기준 또한 없다. 프리사이즈에는 보통 다양한 체형이 소화할 수 있는 니트 소재의 의류가 포함되는데, 기자가 신축성이 없는 프리사이즈 블라우스의 어깨 너비를 재 본 결과 18개 중 무려 절반 이상이 16세 이상 한국 여성의 평균 어깨 너비보다 작았다. 남성복도 예외는 아니다. 최경미 동서울대 패션디자인과 교수는 “요즘은 남성복도 여성복화 되면서 작은 치수를 선호한다”고 말했다.
강재헌 강북삼성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는 “마른 몸을 지향하는 사회의 인식이 바뀐다면 업체는 자연스럽게 큰 사이즈를 생산하게 될 것”이라며 “업체의 기준을 바꾸기 전에 미의 기준을 먼저 돌아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 김여진, ‘프리’ 없는 ‘프리사이즈’ 옷, 다이어트 압박 부추겨 中, 중앙일보, 2019. 12. 21. 발췌 -
지극히 협소한 프리 사이즈 개념에 절망하는 주변인들의 절규를 전해 듣거나 몸소 뼈아픈 실패를 경험해 보는 날이면 패션계의 창과 방패가 떠오르고는 한다. 마른 모델만을 기용해 ‘칼 라거펠트 다이어트’를 유행시켰던 전설적인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는 본인의 브랜드가 거식증을 부추긴다는 지적이 일자 “대중이 마른 몸을 더 선호하는 것뿐이고, 그것을 욕하는 사람은 TV 앞에서 시종일관 감자칩을 씹어 대는 뚱뚱한 여자뿐이다.”라고 발언해 논란에 휩싸인 바 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그의 그늘 아래 놓여 있었다고 볼 수 있는 유명 모델 자밀라 자밀은 오히려 ‘body positive’를 내세우며 자신의 몸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자는 취지의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유행시켰다. 이 캠페인에서 주안점이 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을 혐오하지 않는 것’이다.
나 자신을 혐오하지 않기 위해 역설적으로 세상의 화살을 감내해야만 하고, 심지어는 그것을 동력 삼아 내 몸을 바꾸는 게 생존 방법이라고 가르치는 사회에서 나를 오롯이 긍정하기란 힘든 일이다. ‘body positive’가 규격화된 미용 문화를 가진 한국에서 성공할 수 있을까? 결론은 회의적이다. 자본이 혐오에 앞장서기 때문이다.
칼 라거펠트가 일생 동안 일궈 왔던, 비만한 사람을 혐오하고 배척하는 문화인 ‘팻 셰이밍(Fat-Shaming)’은 비도덕적이라는 이유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기성복을 44-66 사이즈에 국한하고 수치상 s 사이즈인 의류를 프리 사이즈로 판매하는 한국의 기성복 업체와, ‘프로아나(마른 몸을 선망하는 섭식장애 환자)’를 양산하는 sns 마케팅 문화, 그리고 칼 라거펠트의 일생이 얼마나 다른가? 한국에서 ‘프리’란 규범 내의 인구에게만 주어지는 포상 같은 것이다. 특정 조건에서만 주어지는 자유를 과연 진정한 자유라고 볼 수 있는가?
누굴 위한 ‘프리’이고, 누굴 위한 ‘의’인가?
2. 식[食]
“개는 털 날려서 안 돼요.”
“안내견인데요?”
“그래도 안 돼요.”
시각장애인 한혜경 씨는 안내견과 함께 식당으로 향했다. 그러나 혜경 씨를 맞이한 것은 인사가 아니라 날선 손바닥이었다. 보다 못한 취재진이 끼어들어 ‘안내견을 거부하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고 설득해 보지만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안에 손님들이 계셔서요.”
“저희도 손님으로 온 건데.......”
“그런데 다른 손님들이 강아지를 불편해하세요.”
“반려견이 아니에요.”
“알고 있어요.”
일곱 번의 거절을 당한 뒤에야 겨우 출입에 성공한 혜경 씨는 거절이 익숙한 듯 무덤덤하게 또 다른 경험을 풀어 놓았다.
“언제 한번은 배를 탈 일이 있었어요. 제가 객실로 들어가려고 하니까 2층 객실은 올라가지 말라고, 손님들 눈에 띄면 안 된대요. 저희더러 주차하는 공간에 서 있으라는 거예요. (가 봤더니) 차에서 매연이 많이 나오고 있더라고요.”
“나의 사회적 위치가 이쯤인 건가. 생각했죠.”
- 조기호, ‘안내견도 어디든 갈 수 있어요’ 시각장애인이 말하는 안내견 출입 거부 실태, sbs 뉴스, 2019. 08. 25. 발췌 -
3. 주[住]
사랑하는 언니에게.
결혼이란 무엇일까?
우린 지금 웨딩드레스를 입고 하객들 앞에 서 있지만
내일 같이 구청에 가서 혼인신고서를 제출하면 거절당할 거야.
마일리지 합산도, 신혼부부 대출도, 수술 시 동의도, 사망 시 상속도 안 되겠지. 함께하다 보면 분명 힘든 일이 많을 거야.
하지만 원래 인생이 그런 거 아닌가?
마일리지 합산이 안 된다면 내가 언니 카드로 적립을 할게.
신혼부부 대출이 안 되지만 1 주택 세금으로 2 주택을 보유할 수 있어.
수술 시 동의를 못 하게 하면 아는 사람이 있는 병원으로 가자.
사망 시 상속 순위가 밀린다면 미리 공동 명의로 법인을 설립할게.
힘든 일이 많겠지만 함께 해결하지 못할 일은 없을 거야.
- 김규진 작가, <언니, 나랑 결혼할래요?> 中, 결혼선언문 일부 발췌 -
규진 씨는 동성 혼인이 가능한 뉴욕에서 여자친구와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고, 회사에서 신혼여행 휴가를 얻어 내는 데에도 성공했다. 그러나 막상 고국으로 돌아와서는 ‘법적 부부’의 문턱 앞에 가로막혔다.
한국은 동성혼 법제화가 되지 않은 국가이다. 따라서 규진 씨의 결혼 또한 법적으로 성립되지 못한다. 두 사람은 뉴욕과 한국에서 두 번이나 식을 올린 뒤 동거 중인 실질적 부부임에도 불구하고 전세자금 대출에서 불리하며 부부 청약을 넣을 수 없다. 이렇듯 성소수자들은 혼인 관계의 중심이자 인간의 기본권인 ‘주거’ 문제에 있어서 취약한 상황이다.
지난 2013년 10월 부산에선 60대 여성이 40년간 동거해 온 동성 친구가 사망한 후 재산권을 보장받지 못하자 자살한 사건이 발생했다. 경제 공동체였던 파트너가 암으로 사망한 후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A씨는 재산 상속을 두고 유족과 갈등을 빚은 끝에 "장기를 기증해 달라"는 유서를 남긴 후 투신했다.
- [부부의날]부부(夫婦)가 될 수 없는 부부(夫夫) 혹은 부부(婦婦) 中, 뉴시스, 2016. 05. 21. 발췌 -
4. 의식주[衣食住]
2020년, 5년 만에 ‘인구주택총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조사명의 정의는 ‘우리나라의 모든 사람과 주택의 규모 및 그 특징을 파악하기 위한 국가기본통계조사로, 특정한 시점에 한 국가 또는 일정한 지역의 모든 사람, 가구, 거처와 관련된 인구, 경제, 사회학적 자료를 수집, 평가, 분석, 제공하는 전 과정’이다.
조사 과정은 간단하다. 온라인으로 자신이 해당하는 선택지를 고르면 된다. 그러나 몇몇 참여자들은 이렇게 간단한 절차조차 밟지 못한 채 곤경에 빠졌다. 아주 근원적인 문제 때문이다.
미혼인 사람은 연령대에 상관없이 자녀 유무나 출산 계획에 체크할 수 없다. 그러나 기혼자는 연령대에 상관없이 체크할 자격이 주어진다.
파트너가 있는 사람은 가구주와 배우자를 입력할 수 있다. 그러나 동성 파트너가 있는 사람은 입력할 자격이 없다.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자녀를 가지거나 출산을 계획하기 위해서는 결혼 제도로 묶인 이성애자 커플이어야만 한다. 미혼모나 미혼부는 자녀가 있어도 존재를 알릴 수 없으며, 동성애자 커플은 함께 안정된 가정을 꾸려나가고 있는 상대가 있음에도 ‘배우자’가 아닌 ‘고용인’ 또는 ‘하숙인’이 되어야 한다.
인구주택총조사는 표본가구의 기준을 명확히 제시하고 있다. 이성애자일 것. 기혼자일 것. 자녀가 있을 것. 국가 제도를 살펴보면 기준은 더욱 뚜렷해진다. 비혼 독신 가구나 동거인 가구를 제외한 채 신혼부부와 유자녀 가정 위주로 형성되어 있는 제도적 혜택들. 이는 한국이 유자녀 기혼자 가정에 가장 큰 가치를 부여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다시 말해서, 한국사회의 ‘정상 가치’는 가부장 이론에 속해 있다.
OECD 출생 통계를 보면 혼외자식의 비율은 평균 40%이다. 동거와 한부모 가정을 포함한 미혼 유자녀 비율이 무려 열 명 중 네 명에 달하는데, 한국은 2%로 OECD 국가 중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했다. 해외에선 모든 형태의 가정이 ‘시민결합’으로 보호받는 데 반해 한국은 결혼하지 않으면 자녀 양육에 제한적인 사회인 것이다. 19대, 20대 국회에서는 이러한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생활동반자법’이 논의된 바 있으나, 미혼 가구를 허용하면 성 생활이 문란해지고 동성 결합을 부추길 위험이 있다는 등의 우려로 연이어 반려되었다. 그만큼 한국은 정상가족 이데올로기가 굳건히 자리 잡고 있는 국가이다. 정상가족 신화는 핵가족 형태를 강요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일정한 기준을 말미암아 서로 배척하도록 만든다. 이성애자일 것. 결혼할 것. 자녀가 있을 것. 사회적 외견을 갖출 것. 번듯한 생활을 영위할 것. 배척은 사회를 침체시키는 여러 혐오와 직결되어 하나의 현상이 된다. 그곳에는 수많은 혜경 씨와 규진 씨, 비만인, 저학벌 빈자 등의 비주류 인구가 있다.
의식주란 사람이 생활하는 데 기본이 되는 옷과 음식과 집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람이라는 것 외에 특정한 자격 요건이 충족되어야만 한다. 이건 수치와 통계보다 우선시되는 실존의 문제이다. 비만하거나, 장애를 가졌거나, 소수자이거나, 가난과 병력을 극복하지 못한 사람들은 실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숱한 자격 미달 통보를 받는다. 일상 속 차별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서는 법과 제도가 확충되어야 하지만, 약간의 논조만 띠어도 ‘역차별’이라며 비난받는 것이 2020년 한국사회의 현주소이자 창피한 통념이다.
혜경 씨는 말한다. “저도 실명을 경험하기 전에는 제가 아예 안 보일 줄 몰랐어요. 누군가 저와 같은 상황이 되었을 때, 안내견이라는 비상구와 함께 걷게 되었을 때, 우리 사회가 그때는 준비가 되어 있었으면 좋겠어요.”
규진 씨는 말한다. “저한테 왜 이렇게까지 하냐고 묻는 분들이 계세요. 답은 간단해요. 내가 언니 수술 동의서에 서명할 수 있도록. 건강보험료를 따로 내지 않아도 되도록. 그냥 다른 부부들처럼 살 수 있도록. 그런 삶의 편의를 위해서.”
이미 강력히 작용 중인 편견과 차별을 법으로 제재하는 것보다 뚜렷한 해결책은 없다. 그러나 그것을 이뤄내기 위해 우리가 먼저 실천해야 할 것은 ‘수용’이다. 부유한 정상가정에서 마음을 다해 키워낸 딸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푸념 대신 넌지시 대화를 시도한 규진 씨의 아버지처럼 말이다.
“나는 사실 너희 엄마랑 동성동본 결혼을 했어. 그런데 30년이 지난 지금 누가 동성동본 이야기를 하니?”
“동성결혼도 30년 뒤에는 아무것도 아닐 거야.”
소수자와 약자를 향한 칼날이 무뎌질 수 있도록, 다름에 대한 몰이해로 곡해되는 배려가 당연한 것이 될 수 있도록, 사람이라면 누구든 편히 입고 먹고 정착할 수 있도록, 30년 뒤에는 공고한 편견이 아무것도 아닌 사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