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대본은 언제 쓸 거야?
“사람이 전부다.”라는 인생철학을 20년간 변함없이 드라마에 투영해 오며 독보적인 작가 세계를 구축한 노희경... 20년을 한결같이 매일 8시간 이상 글을 쓰는 성실함과 “글과 삶이 따로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 (Yes24 노희경 작가소개)
노희경 작가님의 성실함은 꾸준한 성실함이라면, 나의 성실함은 드문드문한 성실함이다. 듬성듬성 어디가 조금 모자란 성실함 말이다.
대략 오후 9시 '엄마'라는 본캐에서 퇴근하면, '작가'라는 부캐가 눈을 뜬다. 하지만 눈을 뜬다고 해서 바로 글을 쓰기 시작하는 것은 아니다. 뒹굴뒹굴하다, 실질적으로 작업을 시작하는 시간은 대부분 10시 이후부터 이다. 글이 안 써질 때면 나의 부캐는 12시, 12시 30이면 하루 일과를 다 마치지만. 글이 잘 써질 때면 기본 2시, 3시까지 잠을 이루지 못한다.
나의 부캐의 활동시간은 나의 본캐의 의지와 체력에 비례되는데, 의지와 체력이 사그라져버린 요즘. 나의 작업컴퓨터는 책상 위에서 먼지만 쌓이고 있다. 난 글 쓰는 것이 버거울 때면 곧 죽어도 컴퓨터 열어보지 않는다. 글을 쓸 수 있는 통로를 1단계에서 차단해 버리는 것이다. 일시적인 일탈이라면, 대부분 하루 이틀이면 다시 돌아오겠지만, 번아웃이 왔다면 이 증상이 1주일 넘게 지속되곤 한다. 지금 나처럼 말이다.
번아웃이 온 이유는 복합적이지만, 가장 큰 이유는 작업을 할 환경이 잘 조성되지 않았을 때 일어난다. 위의 글을 보면, '장인은 장비 탓을 안 한다던데!'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 수도 있지만, 내가 말하는 환경은 단지 장비만이 아니다. 적어도 나는 글을 쓰기 위해서는 아래의 조건들이 필요하다.
집은 어느 정도 깨끗해야 한다.
원래부터 정리정돈을 잘하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나의 청결레벨은 높은 편이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나도 기준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 기준 아래로 내려가면 '청소해야 되는데'하는 생각이 머리를 나를 지배하기 시작한다. 이 단계에 이르기 전, 나는 나의 마지노선을 사수해야만 한다. 아니면 현재같이 손도 쓸 수 없는 난장판 꼴이 나는 것이다.
적절한 양의 잠이 필요하다.
과외 수업이 끝나고, 난 3일 내내 아이를 재우며 11시간을 내리 잤다. 하지만 잠을 자도, 계속해서 졸렵다. 잠이 늘어서 일까? 아니면 부족한 잠을 다 채우지 못해서일까? 그것도 아니면, 글을 쓰면 잠을 못 잘 것을 알아서일까? 요즘에는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시간이 부쩍 많아졌다.
아이가 건강해야 한다.
아이가 아프면 하루가 정말 너무나 고달프다. 금요일 코감기로 병원에 다녀왔는데, 그다음 날은 수족구 판정을 받았다. 전염병이기도 하고, 아이의 컨디션을 보시고 1주일 쉬어가는 게 어떻겠냐고 의사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일도 일이지만, 결국 이번주 수업은 줌으로 듣게 되었다. 아이가 아프면 아이에게 온갖 시간과 신경을 써야 되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무언가 하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일 스트레스는 감당할 정도만 받을 수 있다면 된다.
요즘에는 이게 잘 안된다. 출근을 안 하는 날에도 일이 없는 날에도 일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 남편은 그냥 할 일만 하면 되는 거라 하지만, 성격인지 뭔지 몰라도 그게 잘 안된다. 이래서 아무리 좋은 직장이라 한 들 모두 마음 깊은 곳에 사표 하나씩은 품고 사는 게 아닐까 싶다.
컴퓨터는 충전되어 있어야만 한다.
정말 사소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서재도 개인 책상도 없는 나는, 노트북을 들고 집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글을 쓴다. 그리고 은근 충전할 곳이 없는 우리 집이기에 노트북 충전을 하려면 코드를 뽑고 넘기고 하는 번거로운(?) 일을 해야 한다. 보통날이면 그냥 그러려니 하겠지만, 지금은 이 사소한 것마저도 노동이다.
예전에 나였으면, 변명이니 뭐니. 나약하니 뭐니 했겠지만. 조금 더 지혜로워진 것일까? 아니면 이것마저도 현재 귀찮은 것일까? 나름 노력하고 있으니 '조금은 너그럽게 나 자신을 봐줘야지?'라는 생각과 '나도 글 쓰는 것이 나의 본업이 되면, 나도 꾸준한 성실함으로 거듭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다음글에는 좋은 소식과 새로운 단편 이야기가 되기를 바라며, 오늘의 투정은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