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드 사태 이후,
우리는 중국의 옹졸한 경제적 제재와 도 넘은 국뽕으로 화가 많이 났다.
그리고 한때 우리에게 돈 많고 너그러웠던 동네 바보 형은 마주칠까 걱정되는 골목길 불량배가 되어버렸다.
잘 나가던 우리 상품의 중국 내 입지가 사드 사태로 인해 사라졌다.
‘요우커’들로 한국에 물밀듯 들어오던 그들과의 물리적 접촉도 코로나로 인해 없어졌다.
이러한 단절은 우리에게 그들을 이해해줄 이유도, 그들에게 관대해질 명분도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한중 양국의 국민 사이에 방파제가 사라진 오늘,
한한령과 중국산 국뽕으로 마주하게 된 중국의 민낯에 우리는 분노를 넘어 혐오의 감정을 느끼고 있다.
그 감정들은 중국 관련 뉴스 기사의 댓글 창에서 여과 없이 확인할 수 있다.
사실 이 옆 동네가 그간 선을 자주 넘기는 했었다.
일본이 ‘기무치’를 가지고 덤벼들던 때와는 완전 다른 차원으로 빨간 맛 배추절임 ‘파오차이’는 자기들 것이라 우기더니,
‘한복’은 한국의 것이기도 하고, 북한의 것이고 하며, 자기들 소수민족의 것이기도 하다는 숟가락 얹기를 시도한다.
물론 이것은 최근의 일들이고, 과거에도 화려한 전과를 지니고 있다.
2002년부터 5개년 국가 계획으로 거창하게 시작한 동북공정에서부터 우리의 과거 역사에 대한 왜곡, 부정, 편입은 시도되어 왔다.
하지만 이것은 불과 우리나라를 대상으로 한 것이고, 중국의 이러한 생떼는 커다란 국뽕, 징고이즘(Jingoism)의 일부일 뿐이다.
‘징고이즘’은 공격적인 대외 정책을 만들어내는 극단적이고 맹목적이며 배타적인 애국주의 혹은 민족주의를 말한다.
이 징고이즘에 빠지면, 자신들이 다른 국가, 민족보다 우월하다고 믿으며 자신의 집단적 이득을 위해 다른 집단들에 대해 위협적인 태도를 보이거나 실질적 위협을 가한다.
이를테면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서 채취되는 목화의 재배농장과 면직물 제조공장에서 중국 내 소수민족에 대한 중국 정부의 탄압 및 박해가 있음이 의심되었다.
몇몇 기업과 국가에서 정치적으로든, 인도적으로든 이 의심에 대한 증거들을 바탕으로 위구르 산 면직물 불매를 선언한다.
그 몇몇 기업이 나이키나 아디다스 같은 세계적 기업이고 중국 내에서도 1, 2위를 다투는 스포츠 브랜드이다.
중국 외교부는 즉각 특유의 격렬한 어조로 반박했다.
여기까지는 그럴 수도 있다고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이제부터 민간의 영역으로 들어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브랜드 매장의 간판이 불타고, 내부가 쑥대밭이 된다.
광고 모델이었던 유명 연예인들은 매일같이 협박성 댓글에 시달려야 한다.
어제까지 자신들에게 열광하던 팬들이, 오늘은 죽창을 든 홍위병처럼 자신을 조여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간 뒤에 처박혀있던 중국 브랜드가 그 반사이익의 수혜자가 된다.
티셔츠에 큼지막하게 박혀있는 ‘中國’, 이 두 글자가 마치 세련된 디자인인 것 마냥 중국의 MZ 세대들은 열광한다.
나이키와 아디다스를 입은 사람은 매국노 취급을 받으며 셀카봉을 쥔 틱톡커에게 일장 훈계를 들을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이 그리 오래갈 만큼 똘똘하지 못하기에 다행이지, 충분히 공포스럽고 비이성적이다.
이것이 중국의 징고이즘이다.
물론 우리도 다른 어느 나라보다 이 중국의 징고이즘을 잘 안다.
문화적 이슈로 두 국민 사이에는 크고 작은 충돌이 여러 차례 있었고, 무엇보다 한한령을 겪어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징고이즘은 도대체 왜 생겨나는 것인가?
타국에게는 징글징글한 이 극단적 민족주의, 집단 이기주의는 중국인의 종특인 것인가?
우선 우린 징고이즘이 생겨나는 원인부터 찾아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얼핏 보기에 어려워 보이는 이 비문명적인 태도의 원인은 사실 상당히 단순하다.
다시 말해, 이는 ‘선빵의 이유’와 같은 것이다.
내가 어린 시절, 한국이 그다지 수준 높지 못하던 그때, 싸움이 나면 너도나도 상대에게 먼저 날리는 주먹 한 방에 집착했다.
상대가 먼저 코피 터지면 내가 승리하는 것이고, 최소한 상대의 기선 정도는 제압하며 시작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세월이 바뀌며 현세대의 수준 있는 부모들은 이런 말을 한다.
“네가 맞기 전까지는 절대로 상대에게 먼저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 된단다.”
하지만 말이 쉽지, 상대의 위협과 그 가운데 존재하는 긴장 사이에서 먼저 한대 쥐어터질 때까지 차분히 기다릴 수 있는 어린이가 몇이나 될까?
이 부모의 당부는 말처럼 쉽지 않은, ‘상대적 강인함’에서 나오는 여유와 용기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결국 내 유년에 믿고 살았던 ‘선빵’은 참으로 비겁하고 유약한 두려움이었던 것이다.
징고이즘은 바로 이런 선빵과 다를 바 없다.
그럼 이 민족적 열등감을 품은 선빵이 중국 인민만의 종특인 것인가?
여러 사람이 실망스럽겠지만 이는 결코 중국인의 종특이 아니다.
징고이즘은 한 국가, 민족의 당시 상태와 앞뒤 상황, 전반적 수준 등 복합적인 요소들이 맞아떨어지며 생길 수 있는 타이밍적 현상이다.
물론 이 현상은 우발적일 수 있고 타이밍에 맞춰 인위적, 정치적으로 만들어질 수도 있다.
미국도 한 나라 전체가 이 징고이즘에 사로잡혀 보낸 시기가 있었다.
“징고이즘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있는 줄로 안다. 만약 징고이즘이란 의미가 미국인들이 다른 외국의 세력들에 대항해 우리의 이익을 위한 해결법과 상식을 견지하는 정책을 의미한다면 우리는 징고들이 맞다!“ - 1895년 루스벨트 대통령
물론 헛소리에 비겁한 변명이다.
맹신적 국뽕은 그저 국뽕일 뿐이다.
19세기의 마지막 수십 년은 미국에 제국주의적 팽창이 진행된 시기였다.
미국은 대서양과 태평양 그리고 중앙아메리카에 걸쳐 폭넓은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했을 뿐 아니라 직접 이들 지역을 지배하기도 했다.
그만큼 미국은 유럽이 두려워해야 할 정도로 강성해져 있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미국의 40년은 순탄치 않았다.
노예 해방을 빌미로 남북이 나뉘어 각자의 이익을 위해 총질을 해댔다.
공업화되는 북부와 풍요로운 남부가 있었지만 그 어디에도 끼지 못한 이민자, 중•하층민들은 새로운 땅, 서부로 이주를 시작했다.
이러한 골드러시는 이미 자기들 땅에서 내몰릴 데로 내몰린 아메리칸 인디언의 마지막 생존권까지 위협하기에 이르렀고,
미합중국 정부는 발버둥 치는 인디언들을 가차 없이 학살했다.
피의 축제 위로 발전과 풍요가 꽃을 피웠다.
가져본 적 없는 힘과 여유는 과거의 기억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과거 영국 식민지 시절의 부담과 압박, 이민의 곤궁함, 뿌리 얕은 국가와 정부.
무엇보다 자신들이 떨쳐낸 유럽의 제국주의가 트라우마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그들의 두 자아가 마주쳐 각성이 시작된다.
과거에 대한 시커먼 ‘피해의식’과 현재의 얄팍한 ‘자긍심’이 맞부딪히며 그들 스스로가 ‘괴물’이 된 것이다.
한때, 그들이 몸서리치며 항거했고 투쟁했던 그 제국주의의 화신이 되어 이제는 다른 약소국을 정복하고 유린했다.
하와이를 흡수했고 푸에르토리코, 필리핀과 괌을 식민지화했다.
그 와중에도 남미에 많은 식민지를 가지고 있는 당시의 초강국 스페인이 몹시 신경 쓰였다.
한때 자신의 지배국이던 영국이 오버랩되어 밤잠을 편히 자기 쉽지 않았으리라.
우선 소심하게 접근했다.
“쿠바를 팔지 않으련? 값은 넉넉히 치러줄게.”
꺼지라는 스페인의 한마디에 두려움은 더욱 커졌다.
스페인을 향한 선빵이 필요했다.
명분이 부족했던 미국 입장에서는 총포에 불을 댕겨줄 힘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큰 돈벌이의 기회임을 진즉에 눈치챈 언론계 거물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와 조프 퓰리처는 전쟁을 열망하는 기득권 세력, 소위 ‘빅브라더’들과 손을 잡았다.
그렇게 매일 같이 스페인의 쿠바 식민 지배에 관한 부정적 기사와 쿠바 전쟁의 당위성을 자극적으로 쏟아부으며 결국은 여론을 끌어올리는 데 성공한다.
전쟁은 벌어졌고 미국은 쿠바를 보호국 명분으로 손에 넣었다.
독립을 열망하며 투쟁 중이던 쿠바는 그렇게 지배국만 바뀌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그 주인공 중 하나인 언론인 퓰리처는 우리가 아는 그 ‘퓰리처상’의 퓰리처가 맞고, 이들이 바로 ‘황색언론’의 시조새들이다.
이렇듯 징고이즘의 발생은 쉽고 간단하게 풀이하자면,
‘무식하고 뭣도 없던 동네 좆밥이
어느 날 살림 좀 피고, 없던 힘이 생기면
과거의 아픈 추억이 언제고 다시 찾아올까 두려워
근본 없이 양아치 짓을 하고 다니는 것‘
이라 할 수 있겠다.
그로부터 100년도 넘는 시간이 흐른 오늘의 중국.
이 중국이 징고 임은 분명하다.
물론 자신들이 부르는 단어는 좀 다양하다.
징고이스트를 자처하는 젊은이들을 ‘분노청년(憤怒靑年)’, ‘샤오펀훙(小紛紅)’이라고 부르고, 징고이즘 열풍을 ‘궈차오(國潮)’라 한다.
그렇다면 중국은 왜 징고의 길을 걷게 되었는가?
위에 풀이한 징고이즘의 발생 원인을 중국 근•현대의 역사 위에 얹어본다면 정확히도 맞아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일제의 식민 통치에서 겨우겨우 벗어나 갱생의 길을 걸으려 했으나,
어느 것도 자신의 것이 아닌 두 외래 이데올로기의 충돌에 휘말리며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을 했다.
그리고 자기들을 공평하게 모두 배불리 먹이겠다고 약속한 승자는 엉뚱하게 문인과 예술가를 잡아 족치고, 자식이 부모를 조리돌리게 만들고, 종국에는 모두를 굶겨 죽였다.
힘든 시간을 끌려오다 보니 어느새 반백년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었다.
출산이 죄악시되고 쓸모없는 황무지만 가득하던 땅덩어리, 낮은 교육 수준의 저임금 인력들이 하루아침에 재산이 되었다.
못 배우고 머릿수만 많은 인구는 세계가 원하는 노동력과 거대한 내수 시장이 되었고, 황무지는 엄청난 천연자원과 희귀자원의 보고임을 알았다.
그렇게 중국은 G2가 되었다.
하지만 중국은 징고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근본이 없기 때문’이다.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 중 한 곳이며, 4대 성인 중 한 분을 배출한 곳이기도 하고, 고대 아시아 문화의 최고봉인 이 땅에 근본이 없다니...
그렇게 따진다면 아마 정확한 표현은 ‘근본을 없앴기 때문’ 일 것이다.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은 일제가 중국의 문화와 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반세기 간 해온 노력 속에서도 살아남아 뿌리를 이어온 중국의 근본을 씨 말리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문화대혁명이 사라지고 난 이후, 그것의 오류와 폐해를 너무도 잘 인식했지만, 재건이 거의 불가능했다.
마오쩌둥과 그의 시간은 사라졌지만, 그 주체는 여전히 사회주의 공산당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중국의 문화와 선조를 유산이나 민족정신으로 인정할 수 없다.
적폐이고 인민을 좀먹는 마약인 것이다.
결국 이 나라에서 근본은 사라졌다.
그래서 이들의 콤플렉스는 명확하다.
‘소프트파워’
허구한 날 죽자고 ‘중화사상(中은 중앙을, 華는 문화를 뜻한다)’을 부르짖어 보지만 문화가 사라진 중화사상은 앙꼬 없는 붕어빵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타국의 ‘소프트파워’는 너무도 무섭다.
인민은 결핍된 채 살아온 이 문화에 늘 목마르다.
과거, 유럽과 식민지 문화의 결합으로 탄생한 홍콩의 누아르는 오묘한 자극으로 그들을 홀렸다.
미국산 콘텐츠의 ‘박애주의’, ‘희생정신’, ‘개척정신’은 이들의 마음을 뜨겁게 달궜다.
그리고 우리의 화려하면서도 섬세하고, 저돌적이면서도 우아한 콘텐츠들이 그 바통을 이어받았다.
이제 우리는 한발 나아가 과거와 현재의 결합을 넘어서 과거를 재해석하고 부활시키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 모든 것이 중국 인민에게는 불가항력적인 결핍 요소인 것이다.
전체주의 중국 독재 정부의 입장에서 이 얼마나 두렵고 경계해야 할 대상인가?
십분 이해가 간다.
그렇기에 그들은 100년 전 미국의 졸렬한 협작을 이용한다.
인민의 문화 수준을 묶어놓고 : 교육 평준화, 문화산업 통제, 비문화산업 육성 등
여론을 조장하고 호도하며 : 국•민영 매체 활용 선동, 해외 문화 비판, 문화 대립 조장 등
인민의 이목을 하나로 집중시킨다 : 국수주의 콘텐츠 진흥, 해외 문화•정보 접속 차단 등
그리고 이 어려운 것들을 손쉽게 가능토록 해주는 수단이 바로 ‘국뽕’인 것이다.
오늘은 우리나라 제20대 대통령의 취임식이 있던 날이다.
국가 부주석인 왕치산이 그 자리를 축하하기 위해 한국에 방문해 있다.
그리고 우리는 “중국이 변했어요”라며 나름 뿌듯해하고 있다.
하지만,
역대 대통령의 퇴임 후 스토리를 연예인의 부정적 가십과 한데 묶어 ‘말로의 비참함’을 비웃고 있다.
우리가 이들과 교류하며 보낸 시간이다.
이제는 알 때도 되지 않았을까?
이들이 과연 어떤 이들인지, 어떤 사고를 하고, 어떤 행보를 할지 말이다.
그리고 이들이 어떠한 성향을 보이고 있는지도 말이다.
‘강약약강’
(强弱弱强•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함)
이제 그만 만만하게 보일 때도 된 것 같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