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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챠오 Aug 09. 2023

판 더 벤, ‘36km로 달리는 왼발잡이 센터백'

토트넘은 2010년대 중반, 마우리시오 포체티노 감독의 지휘 아래 전성기를 구가했다. 우승컵을 차지하진 못했지만, ‘DESK’ (델레 알리, 크리스티안 에릭센, 손흥민, 해리 케인) 라인으로 대표되는 젊고 빠른 공격진을 필두로 매력적인 축구를 선보였다.


젊고 매력적인 공격진 외에도 토트넘을 지탱했던 것은 든든한 수비진이었다. 특히 토비 알데르베이럴트와 얀 베르통언이 구축한 센터백 듀오는 ‘DESK’ 라인이 마음껏 공격에 집중할 수 있도록 팀의 중추 역할을 해냈다.

두 선수가 클럽을 떠난 이후, 토트넘은 줄곧 수비 불안에 시달렸다. 큰 기대를 모았던 다빈손 산체스는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했고, 에릭 다이어, 조 로든 등은 불안한 경기력으로 일관하거나 임대를 전전했다. 풀백이었던 벤 데이비스가 센터백으로 나오는 고육지책을 쓰기도 했다.


토트넘은 21/22 시즌 크리스티안 로메로를 영입하며 뒤늦게나마 수비진 보강에 힘썼지만, 로메로 혼자서는 몇 년간 지속됐던 수비 불안을 잠식시키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토트넘은 22/23 시즌 프리미어리그 기준 38경기에서 63실점을 허용하며 최다 실점 5위라는 불명예스러운 순위에 이름을 올렸다. 70득점을 기록하며 최대 득점 5위에 올랐다는 점을 생각했을 때, 안정된 수비력이 동반됐다면, 더 높은 성적을 거둘 수도 있었을 토트넘이었다.


수비진 보강의 절실함을 다시 한번 느낀 토트넘은 결국 또 하나의 영입을 결심했다. 유럽 축구 이적시장에 정통한 파브리지오 로마노 기자는 2023년 8월 4일 자신의 개인 SNS에 시그니처 문구 “Here We Go”와 함께 볼프스부르크의 미키 판 더 벤이 토트넘으로 이적한다는 소식을 알렸다.


토트넘 수비진 재건의 중책을 맡게 될 판 더 벤 / 출처 - 파브리지오 로마노 개인 sns


본래 이적시장에서 ‘저비용 고효율’을 추구해 오던 토트넘은 판 더 벤의 이적료로 5,000만 유로 (약 720억 원)를 쏟아부으며 그에게 크나큰 기대감을 갖고 있음을 내비쳤다. 판 더 벤은 토트넘의 수비 불안을 해결할 수 있을까. 그의 어떤 모습이 ‘구두쇠’ 스크루지 영감처럼 굳게 닫혔던 토트넘의 지갑을 열게 했는지 알아보자.




선수 소개


네덜란드의 미래로 평가받는 미키 판 더 벤 / 출처 - 판 더 벤 개인 sns


미키 판 더 벤은 네덜란드 국적의 센터백이다. 2001년생으로 차세대 네덜란드 수비진의 미래로 평가받고 있다. 현대 축구에서 각광받는 왼발잡이 센터백으로, 193cm에 81kg이라는 당당한 피지컬을 갖추고 있으며 스피드까지 빨라 제공권과 뒷공간 커버 모두 가능한 선수로 평가받는다. 빠른 스피드를 활용해 풀백 역할까지 소화할 수 있는 다재다능함도 지니고 있다.


네덜란드의 폴렌담 유스 아카데미에서 성장한 판 더 벤은 19/20 시즌 1군 무대에 데뷔하며 1군 무대를 밟았다. 데뷔 첫 시즌부터 리그 경기 기준 19경기에 출전하며 1군에 연착륙한 판 더 벤은 20/21 시즌 26경기에 출전, 2골 1도움을 기록하며 팀의 주전으로 자리 잡았다.


급격한 성장세를 보인 판 더 벤에게 폴렌담과 폴렌담이 속한 네덜란드 2부 리그는 너무 작았다. 20/21 시즌 종료 후 그의 가능성을 지켜본 에레디비시의 여러 클럽들과 프랑스의 마르세유, 독일의 볼프스부르크가 관심을 보였고, 결국 판 더 벤은 볼프스부르크의 유니폼을 입었다.


21/22 시즌 분데스리가 기준 5경기만을 출전하며 네덜란드 2부 리그에서 분데스리가로 급격하게 달라진 리그 수준에 힘겨워하던 판 더 벤은 절치부심한 22/23 시즌, 분데스리가 34경기 중 33경기에 출전하며 반등했다. 출전한 33경기 모두 선발 출전일만큼 부동의 주전으로 팀 내 입지를 굳혔고, 시즌 도중 2027년까지 재계약을 맺으며 활약을 인정받았다.


재계약까지 맺으며 판 더 벤을 클럽의 미래로 낙점했던 볼프스부르크였지만, 그의 활약을 지켜본 토트넘은 그를 간절히 원했다. 희소성이 높은 왼발잡이 센터백이라는 장점과 꾸준했던 그의 성장세, 당당한 피지컬과 빠른 스피드는 토트넘의 구미를 당기기에 충분했고, 결국 토트넘은 클럽 역대 3위에 해당하는 5,000만 유로의 이적료로 판 더 벤을 영입했다.




토트넘은 Why?


토트넘은 22/23 시즌 프리미어리그에서만 63실점을 허용했다. 흔히 ‘빅 6’로 분류되는, 토트넘이 유럽 대항전 진출권과 리그 우승을 두고 직접적으로 다투는 빅클럽들 중에 토트넘보다 많은 실점을 허용했던 클럽은 없었다. 토트넘보다 많은 실점을 허용한 클럽은 강등됐거나 턱걸이로 간신히 강등을 면했던 클럽들 뿐이었다.


토트넘은 이에 거액을 들여 판 더 벤을 영입했다. 로메로와 함께 수비진을 재건할 중책을 짊어질 선수로 22세의 젊은 선수를 선택했다. 클럽 역대 3위라는 이적료를 생각한다면 토트넘이 그토록 고수했던 ‘가성비’라는 요소에 치우쳐진 결정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다소 과감하게 보일 수도 있는 이 선택의 근거는 무엇일까.




왼발잡이 센터백


현대 축구에서 후방 빌드업의 중요성이 대두되면서 왼발잡이 센터백의 가치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판 더 벤 역시 이러한 흐름에 편승해 가치가 높아진 선수 중 한 명이다.


19/20 시즌 12월 10일 아스널과 울버햄튼과의 경기 / 출처 - 디 애슬레틱


위 경기는 19/20 시즌에 열린 아스널과 울버햄튼의 경기이다. 이날 아스널은 체임버스와 소크라티스를 각각 오른쪽과 왼쪽 센터백으로 기용했다. 소크라티스는 스포츠 전문 매체 ‘디 애슬레틱’에 따르면, 18/19 시즌 프리미어리그 기준 센터백들 중 왼발로 패스하는 비율이 가장 낮았던 선수로 왼발로 하는 패스에 약점을 가지고 있는 선수였다.


만약 위 상황에서 소크라티스가 주 발인 오른발로 티어니에게 패스를 하게 된다면, 공은 사진 속 3명의 웨스트햄 선수들에게 향하는 궤적을 그리며 굴러가 패스 차단의 위험이 높아졌을 것이다. 대신 왼발로 패스를 한다면 웨스트햄 선수들에게 멀어지는 궤적을 그리며 차단될 위험 없이 안전하게 티어니에게 전달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왼발 패스가 익숙하지 않은 소크라티스는 해당 장면에서 전진 패스를 하지 못하고 후방의 레노 골키퍼에게 백패스를 내주고 말았다. 이처럼 소크라티스는 경기 내내 왼발 패스가 필요한 상황마다 주저하며 팀의 빌드업에 제대로 관여하지 못했다.


위 사례와 같이 왼발잡이 센터백은 특정 위치에서 오른발잡이 센터백보다 안정적으로 빌드업을 이어갈 수 있다. 아스널은 이후 파블로 마리, 가브리엘 마갈량이스 등 왼발잡이 센터백을 영입하며 해당 문제점을 해결했다.


세계 최고의 감독 중 한 명으로 꼽히는 펩 과르디올라 감독 또한 왼발잡이 센터백에 대한 갈증으로 맨시티에서 에므리크 라포르테, 나단 아케 등을 영입했으며, 23/24 시즌을 앞두고 요슈코 그바르디올을 9,000만 유로 (약 1280억 원)이라는 거액에 데려온 바 있다.


또한 토트넘도 이미 왼발잡이 센터백을 보유하기 위해 노력해 온 전적이 있다. 콘테 감독 시절 임시방편의 성격이 강했지만, 왼발잡이 풀백이었던 데이비스를 센터백으로 전환시켰고, 22/23 시즌 바르셀로나에서 입지를 잃어버린 클레망 랑글레를 임대 영입하는 등 후방 빌드업의 다양성을 위해 힘썼다.


판 더 벤은 이러한 토트넘의 노력에 결실을 맺어줄 영입이 될 수 있다. 그는 장거리 패스에 능하지는 않지만 공을 다루는 기술이 훌륭하며, 뛰어난 패스 능력을 갖고 있다.


판 더 벤의 22/23 시즌 분데스리가 기준 오픈 플레이 패스 성공률 순위 / 출처 - 분데스리가 공식 홈페이지


위 데이터는 22/23 시즌 분데스리가 기준 오픈 플레이 상황에서의 패스 성공률 순위를 나타낸 것이다. 판 더 벤은 90.62%의 성공률을 보이며 9위에 올랐다. 고무적인 부분은 맨시티가 9,000만 유로를 주고 영입한 그바르디올과 단 0.48%의 차이만을 보였다는 사실이다. 판 더 벤의 이적료는 단 돈(?) 5,000만 유로다.




로메로와의 수비 궁합


22/23 시즌 토트넘의 수비진은 처참했다. 하지만 로메로는 달랐다. 그는 22/23 시즌 무너진 토트넘의 수비진 속에서 홀로 고군분투하며 팀의 최후방을 지켰다. 2022 카타르 월드컵 우승이라는 쾌거도 이뤘다.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로메로는 높은 확률로 23/24 시즌에도 주전 센터백으로 토트넘의 후방을 지킬 것이다. 그렇다면 토트넘은 새로운 센터백과 로메로가 좋은 궁합을 보일 수 있을지 고려하는 것을 영입에 있어 최우선 요소 중 하나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로메로는 널리 알려졌다시피 적극적인 수비 성향을 지닌 선수다. 도전적인 태클과 터프한 플레이로 상대 공격수를 압박한다. 하지만 이는 카드 수집이 잦고 공을 탈취하지 못할 시, 뒷 공간을 내줄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판 더 벤은 이런 로메로의 단점을 커버할 수 있는 선수이다.


디 애슬레틱이 책정한 22/23 시즌 판 더 벤의 스카우팅 차트 / 출처 - 디 애슬레틱


위 차트는 ‘디 애슬레틱’이 책정한 22/23 시즌 판 더 벤의 스카우트 데이터이다. 차트를 살펴보면, 그가 수비수임에도 ‘Defensive’ 부문에서 점수가 극단적으로 낮은 것을 볼 수 있다. ‘디 애슬레틱’은 그가 수비수임에도 불구하고 ‘자유방임적’ 플레이 성향을 갖고 있어, 데이터만으로는 그를 전부 알 수 없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디 애슬레틱’이 평가했던 것처럼 판 더 벤은 도전적으로 공격수에게 달려드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다. 그는 상대 공격수에게 공을 탈취하려 하는 대신 뒷 공간을 커버하거나 상대의 공격을 지연시키는 방식으로 경기에 임한다.  로메로의 공격적인 성향과 정반대의 성향이라 할 수 있다.


두 선수의 극단적으로 다른 플레이 스타일은 서로의 단점을 보완해 줄 수 있다. 로메로는 판 더 벤에게 부족한 적극성이, 판 더 벤에게는 로메로의 적극성 뒤에 오는 리스크를 커버할 수 있는 침착성이 있다. 두 선수의 조합이 기대되는 이유다.




빠른 스피드


과거에는 ‘센터백은 느리다’라는 전제가 진리처럼 여겨졌던 시절이 있었다. 큰 키에 반비례해 떨어지는 민첩성과 속도는 센터백들이 불가피하게 갖게 되는 단점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김민재, 다욧 우파메카노, 안토니오 뤼디거 등 이러한 전제를 깨부수는 센터백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190이 넘는 피지컬에 공격수와 뛰어도 뒤지지 않는 스피드를 갖춘 센터백들은 제공권과 함께 안정적으로 뒷공간을 커버하기 시작했고, 이들의 가치는 더욱 높아졌다.


판 더 벤 또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만큼 빠른 스피드를 보유하고 있다.


22/23 시즌 분데스리가 최고 속력 순위 / 출처 - 분데스리가 공식 홈페이지


위 데이터는 22/23 시즌 분데스리가 기준 최고 속력의 순위를 매긴 것이다. 카림 아데예미, 알폰소 데이비스 등 준족으로 유명한 선수들 사이 판 더 벤은 시속 35.97km/h로 공동 9위에 올랐다. 10위 안에 든 선수들 중 유일한 센터백이라는 점도 주목할만한 대목이다.


점점 정교해지는 압박 전술과 그로 인한 빠른 공수 전환, 역습이 성행하는 현대 축구 흐름에서 제공권과 빠른 스피드를 두루 갖춘 센터백의 가치는 높다. 토트넘이 판 더 벤에게 쏟아부은 5,000만 유로는 적어도 현시점까지는 비싸게 느껴질 이유가 없다.




토트넘은 변화의 시간을 겪고 있다. 새로운 감독이 부임했고, 변함없이 골을 넣어주던 에이스 해리 케인은 클럽에 남아있을지조차 확실하지 않은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토트넘은 5,000만 유로라는 거금을 들여 22세의 젊은 선수를 영입했다.


프리미어리그에서 새로운 도전에 나설 판 더 벤 / 출처 - 판 더 벤 개인 sns


생애 첫 프리미어리그라는 사실과 22세에 불과한 어린 나이는 그를 바라보는 팬들과 전문가들에게 다소 불안감을 안겨줄 수 있다. 더구나 그 클럽이 작년에 63골이나 실점했던 클럽이라면, 고작 이 젊은 선수 한 명이 과연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불안감과 의구심은 모두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다. “판 더 벤은 시속 36km로 달리는 193cm의 왼발잡이 센터백이다” 이러한 선수를 마다할 클럽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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