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이크 아웃’
스포츠에서는 흔히 급격하게 성장해 이전과는 다른 수준의 활약을 펼치는 현상을 표현할 때 쓰이는 용어다. 22/23 시즌은 이강인에게 ‘브레이크 아웃’ 그 자체였다.
22/23 시즌 이강인은 마요르카 소속으로 라리가 36경기 출전, 6골 6도움을 기록하며 리그 정상급 미드필더로 거듭났다. 기존 장점으로 평가받던 킬패스 능력과 드리블 능력은 더욱 완숙해졌고, 단점으로 지적되던 스피드와 수비 가담, 오프 더 볼 무브 능력까지 보완하자 그는 단숨에 마요르카의 에이스로 자리 잡았다.
그의 폭발적인 퍼포먼스에 소속팀인 마요르카 또한 반등했다. 시즌 전 유력한 강등 후보로 꼽히던 마요르카는 이강인의 활약에 힘입어 9위로 22/23 시즌을 마쳤다. 승점 1점 차이로 겨우 강등을 면했던 21/22 시즌과 비교한다면, 기대조차 하지 못했던 높은 순위였다.
이강인의 괄목할만한 성장은 유럽 전역의 빅클럽들의 시선을 끌었다. 바이아웃 금액이 걸려 있었지만,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결국 2023년 7월 8일, 유럽 최고 수준의 클럽 중 하나로 평가받는 PSG가 5년의 계약 기간과 2200만 유로 (약 314억 원)의 이적료로 이강인을 영입했다.
PSG는 23/24 시즌을 앞두고 클럽의 아이콘이나 다름없었던 음바페의 계약 문제와 리오넬 메시의 이적으로 공격진을 재편해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다. 클럽의 숙원인 유럽 대항전 우승을 위해선 즉각적인 전력 보강이 시급한 가운데, PSG는 이강인이 클럽의 숙원을 풀어줄 일원이 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렇다면 PSG는 이강인의 어떤 능력에 매료됐을까. 그는 PSG의 새로운 창이 될 수 있을까.
이강인은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2001년생, 174cm 71kg의 공격형 미드필더이다. 공격 전 포지션을 두루 소화할 수 있는 선수로, 왼발잡이라는 특징에 뛰어난 드리블과 창의성이 돋보이는 패스 능력이 장점으로 꼽힌다.
2007년 당시 ‘날아라 슛돌이’라는 축구 프로그램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낸 이강인은 어린 나이임에도 또래에 비해 압도적인 실력을 선보이며 주목을 받았다. 이후 발렌시아의 입단 테스트에 합격해 2011년 첫 유럽 생활을 시작했다.
발렌시아 유스 시절부터 천재적인 재능이란 찬사와 함께 성장한 이강인은 2017년 12월 21일, 발렌시아의 B팀인 발렌시아 메스티야에서 성인 무대 데뷔전을 치렀다. 당시 이강인의 나이는 만 16세로, 그야말로 파격적인 성장이었다. 그리고 그는 다음 시즌인 18/19 시즌 1군으로 승격, 11경기에 출전하며 꿈에 그리던 라리가 무대에 입성했다.
순탄하게 성장하던 이강인이었지만, 구단 수뇌부가 그를 방해했다. 발렌시아의 구단주였던 피터 림과 이전 감독들은 잦은 트러블과 불화를 일으키면서 구단 운영에 차질을 빚었다. 이 과정에서 피터 림 구단주는 이강인을 감독 경질의 명분으로 사용하는 등 정치적 목적으로 그를 이용했고, 이후에도 이강인의 성향과는 맞지 않는 감독들이 발렌시아에 부임하면서 클럽에서 이강인의 입지는 점점 좁아졌다.
결국 이강인은 21/22 시즌을 앞두고 마요르카로 이적했다. 리그에서 최약체로 꼽히던 클럽 사정과 수비 가담이 부족하고 스피드가 느리다는 단점이 부각되면서 주전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던 이강인은 마요르카 이적 첫 시즌에 34경기 (16 경기 선발) 1골 3도움이라는 다소 저조한 성적을 기록했다.
그러나 이강인은 결국 스스로 자신에 대한 물음표를 느낌표로 바꿔냈다. 장점만큼 뚜렷한 단점들을 보이며 한계를 보였던 21/22 시즌을 뒤로하고 단점들을 하나씩 보완하기 시작했다. 가장 큰 단점으로 지적받던 스피드 강화를 위해 피지컬과 체력적인 면을 강화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았다. 체격은 다부져졌고, 스피드는 빨라졌다. 체력이 좋아지면서 수비 가담도 활발해졌고, 여유가 생기면서 공이 없을 때의 움직임도 좋아졌다. 단점이 보완되자 장점이 더욱 부각됐고, 어느덧 부동의 에이스로 자리 잡았다.
그의 급격한 성장에 유럽 유수의 클럽들이 관심을 보였고, 메시가 떠난 PSG가 똑같은 왼발잡이에 드리블이 능한 이강인을 영입했다. 강등권으로 꼽히던 클럽에서 뛰던 이강인은 단숨에 유럽 최정상을 노리는 빅클럽의 일원이 됐다.
PSG는 메시의 이적, 음바페의 계약 문제 등으로 공격진 구성에 큰 차질이 생긴 상황에서 이강인을 영입했다. 항상 즉각적인 결과를 요구받는 빅클럽이 중요한 변화의 변곡점에서 영입한 선수라는 점에서, PSG가 이강인에게 거는 기대감은 상당하다고 할 수 있다.
단, 약소 클럽의 에이스가 빅클럽에 영입되어 부진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비일비재하다. 그렇다면 PSG는 왜 이강인을 선택했을까? 그의 어떤 점이 클럽에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을까?
이강인이 뛰어난 드리블러라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졌다. 어쩌면 이강인의 드리블 능력은 PSG가 이강인을 영입하는 데에 가장 큰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위 분포도는 22/23 시즌 이강인이 라리가에서 기록한 드리블 관련 데이터이다. 이강인은 129번의 드리블 시도 중 90번을 성공하며 69.8%의 성공률을 기록했다. 22/23 시즌 라리가의 평균 드리블 성공률은 47.2%였다.
90번의 드리블 성공 횟수는 미드필더로 분류되는 선수 중 1위였고, 그가 기록한 69.8%의 성공률은 50번 이상 드리블을 시도한 선수 중 1위에 해당하는 성공률이었다.
이강인은 거리를 막론하고 시즌 내내 날카로운 드리블을 선보였다. 위 분포도는 이강인이 22/23 시즌 라리가 기준 20야드 (18.288m) 이상 볼을 운반한 수치를 나타낸 데이터이다. 수비적으로 나섰던 팀의 특성상, 하프 스페이스 아래에서 출발한 경우가 다소 많았음에도 안정적으로 볼을 운반하며 팀의 공격 첨병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PSG는 메시를 떠나보내고, 팀의 에이스로 꼽히는 음바페와 계약 문제로 진통을 앓고 있다. 두 선수 모두 뛰어난 드리블 능력을 선보였던 만큼, 두 선수의 공백을 메꿀 수 있는 드리블러의 영입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드리블이라는 특정 장점으로 큰 관심을 얻고, 실제로 눈에 띌 만큼 뛰어난 퍼포먼스를 보인 이강인이지만, 그의 공격적 재능은 비단 드리블에 그치지 않는다. 애당초 이강인은 드리블도 드리블이지만, 정확한 킥과 넓은 시야를 바탕으로 창의적인 패스를 즐기는 플레이메이커 유형의 선수다. 그는 드리블로 수비진을 벗겨내는 것 외에도 여러 가지 방식으로 공격에 기여할 수 있다.
위 차트는 22/23 시즌 라리가 기준 이강인의 공격 작업 관여도를 나타낸 데이터이다. 팀원의 슈팅을 만드는 빌드업 참여 횟수와 직접 슈팅을 날린 횟수가 거의 비등하다는 점은 그가 마요르카의 공격 전술에 막대한 비중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이강인이 5골 5도움 이상을 기록한 라리가 유일의 미드필더라는 사실 또한 그가 마요르카의 공격력에 미친 영향력을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마요르카는 9위라는 리그 성적이 무색하게 22/23 시즌 리그 37골만을 득점하며 리그 최하위 수준의 공격력을 선보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해당 기록은 더욱 빛난다.
이제 이강인은 마요르카 시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뛰어난 동료들과 함께 하게 됐다. 그가 22/23 시즌 마요르카에서 보여준 퍼포먼스를 유지한다면, PSG는 날카로운 창을 하나 얻게 된 셈이나 다름없다.
2021년 3월 25일, 대한민국 대표팀은 요코하마 닛산 스타디움에서 열린 일본과의 A매치에서 0대3으로 패배하며 이른바 ‘요코하마 참사’를 겪었다. 해당 경기에서 이강인은 ‘폴스 나인’으로 깜짝 선발 출전했지만,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한 채 후반전 시작과 함께 교체 아웃됐다.
2년이 조금 넘은 지금은 어떨까. 표본은 적지만 이강인은 공격수 포지션에서도 뛰어난 성과를 냈다.
이강인은 월드컵과 라리가, 코파 델 레이 경기를 포함해 모두 40경기에 출전했다. 그중 공격수 포지션으로 8경기에 출전, 2골 4도움을 기록하며 가장 뛰어난 공격 포인트 생산력을 보였다.
22/23 시즌, 10월 23일 발렌시아와의 경기에서 5-3-2 포메이션의 투톱 포지션으로 출전해 득점한 이강인은 3월 12일 레알 소시에다드와의 경기에서 똑같이 5-3-2 포메이션의 투톱 포지션으로 출전해 다시 한번 득점했다. 9월 3일, 9월 11일 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와의 경기에서 연속 도움을 기록하는 등 스트라이커 포지션에서도 장기인 킬패스 능력 또한 여전했다.
현재 PSG의 스쿼드에 스트라이커로 분류되는 선수는 2002년생의 우고 에키티케가 유일하다. PSG의 최전방을 책임지기엔 아직 경험이 부족한 어린 선수라는 점에서, 이강인의 스트라이커 포지션에서의 활약은 마땅한 스트라이커 보강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PSG 입장에서 반가운 대목이다.
PSG가 3백 포메이션의 사용이 빈번해지고 있다는 점 또한 이강인의 스트라이커 활용의 가능성을 높인다. PSG는 22/23 시즌 리그 1 기준 38 경기 중 26 경기에서 3백 포메이션을 사용했다. 이는 마요르카가 자주 쓰던 5백 전술과 흡사한 포메이션이다.
이미 PSG는 이강인과 함께 영입한 마르코 아센시오를 수차례 제로톱으로 기용하며 제로톱 시스템에 대한 실험을 지속하고 있다. 아센시오가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PSG의 이적시장이 이대로 마무리된다면, 이강인의 스트라이커 기용 가능성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이강인의 PSG 이적은 그의 커리어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PSG는 매 시즌 리그 우승과 함께 유럽 챔피언스리그 우승컵을 두고 다투는 클럽이다. 꾸준히 유럽 챔피언스리그에 출전할 수 있고, 다른 빅클럽들에게도 지속적으로 자신을 어필할 수 있다.
스포츠 전문 매체 ‘디 애슬레틱’은 PSG가 이강인으로 메시의 빈자리를 대체하려 한다며 이강인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냈다. 또한 ‘디 애슬레틱’과 또 다른 스포츠 전문 매체 ‘옵타 애널리스트’는 각각 이강인을 ‘25세 미만 23/24 시즌 주목할만한 선수 50’과 ‘23/24 시즌 주목할만한 선수 50’에 선정하기도 했다.
적응에 큰 어려움은 없을 것으로 전망된다. PSG에 새로 부임한 루이스 엔리케 감독은 스페인 축구에 정통하다. 바르셀로나에서 메시와 함께 트레블을 달성한 전적도 있다. 스페인에서 커리어의 전부를 보냈던 이강인과 좋은 궁합을 보일 수 있다.
PSG는 변화의 기로에서 이강인을 선택했다. 강등권 클럽의 에이스였던 이강인은 한 시즌만에 유럽 정상을 노리는 클럽의 일원이 됐다. 그가 PSG의 숙원을 풀어줄 수 있을까. 파리에 “Lee”가 울리는 날이 머지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