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8월 5일, 맨시티는 7700만 파운드(한화 약 1290억 원)라는 막대한 이적료를 쏟아부어 크로아티아 출신의 요슈코 그바르디올을 라이프치히에서 영입했다. 왼발잡이라는 희소성과 국가대표팀과 소속팀에서 보여줬던 그바르디올의 경기력과 21살이라는 젊은 나이는 그의 가치를 급등시켰다.
모든 관심과 시선이 그바르디올과 맨시티로 쏟아졌을 때, 토트넘은 8월 8일 1000만 유로(약 143억 원)의 추가 지급 옵션이 있는 4000만 유로(약 572억 원)의 이적료로 미키 판 더 벤을 영입했다.
고질적인 문제로 떠오르던 토트넘의 수비 불안을 해결할 적임자로 선택받은 판 더 벤이었지만, 이적 당시 그는 그바르디올만큼 주목을 받진 못했다. 왼발잡이 센터백에 20대 초반이라는 젊은 나이, 분데스리가 출신 등, 그바르디올과 유사한 점이 많았음에도, 그바르디올과 그를 동일 선상에 두고 비교하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다소 외면받았던 판 더 벤은 반전을 일으켰다. 프리미어리그 38경기 중 9경기를 치른 현재, 판 더 벤은 그바르디올에 준하는, 아니 어쩌면 그바르디올을 넘어서는 퍼포먼스로 토트넘을 1위로 끌어올렸다. 그의 존재로 토트넘은 진지하게 프리미어리그 우승 경쟁을 할 수 있는 팀으로 거듭났다.
토트넘은 22/23 시즌 프리미어리그에서만 63점을 실점했다. 이는 뒤에서 5번째로 많은 실점이었다. 70골을 넣으며 리그에서 5번째로 많은 득점을 올린 토트넘이었지만, 허술한 수비력으로 인해 안정적으로 승점을 쌓지 못했다. 결국 토트넘은 8위에 그치며 유럽 대항전 진출권조차 얻어내지 못했다.
다빈손 산체스와 에릭 다이어는 재앙에 가까운 경기력으로 팬들의 혈압을 상승시켰고, 든든한 수문장이었던 위고 요리스마저 급격한 노쇠화를 겪으며 무너졌다. 크리스티안 로메로가 홀로 고군분투했지만, 그 혼자서는 역부족이었다. 토트넘 수비진에는 새로운 선수가 필요했다.
판 더 벤은 등장과 동시에 토트넘의 수비를 안정시켰다. 그는 토트넘의 전술 전체에 긍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현대 축구에서 더 이상 수비 라인을 깊숙이 내리는 것은 실점 억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난 시즌 콘테 감독의 토트넘은 5백을 쓰며 깊은 곳에 수비 라인을 위치시켰지만, 이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수비 라인을 올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수비 라인을 올리면 그만큼 상대 공격수가 공략할 수 있는 뒷공간이 노출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라인을 올려도 뒷공간을 커버할 수 있는 발 빠른 센터백은 항상 각광받는다. 판 더 벤은 이러한 현대 축구의 흐름에 정확히 부합하는 선수다.
22/23 시즌 카림 아데예미, 알폰소 데이비스 등 준족으로 유명한 선수들 사이 판 더 벤은 시속 35.97km/h로 공동 9위에 올랐다. 10위 안에 든 선수들 중 유일한 센터백이라는 점도 주목할만한 대목이다.
그의 등장으로 토트넘은 보다 공격적으로 라인을 끌어올리고 공격적인 전방 압박을 가할 수 있게 됐다. 그러한 변화는 빠른 공격 전개로 유명한 리버풀과의 경기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우도지가 볼을 잃어버리면서 리버풀은 단숨에 역습 기회를 맞이했다. 로메로와 판 더 벤은 높은 위치에서 위험에 노출 돼있다.
정확한 킥을 자랑하는 트렌트-알렉산더 아놀드가 토트넘의 뒷공간을 노리는 위협적인 패스를 찔렀다. 코디 각포가 공간을 포착하고 뛰어들어가지만 판 더 벤 또한 위험을 감지하고 각포와 속도 경쟁을 벌인다.
각포가 먼저 뒷공간을 노렸지만 판 더 벤이 각포를 제압하고 패스를 낚아채 비카리오에게 공을 건네며 상황을 종료시켰다. 이러한 장면은 경기 내내 반복됐고, 공격이 풀리지 않아 짜증을 내던 디에고 조타는 감정적인 두 번의 파울과 함께 퇴장당했다. 토트넘은 리버풀을 상대로 7년 만에 승리를 거뒀다.
공을 잃어도 뒷공간을 커버할 수 있는 수비수의 등장으로 토트넘 선수들은 좀 더 과감하게 경기를 풀어나갈 수 있게 됐다. 토트넘은 보다 적극적이고 공격적으로 전방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고, 이는 자연스럽게 경기 주도권의 향상으로도 이어졌다.
경기 주도권 향상은 데이터로도 즉각 나타났다. 판 더 벤 가세 이후 토트넘은 지난 시즌 파이널 서드에서 43%에 그쳤던 패스 비율을 63.1%까지 끌어올릴 수 있었다. 작년 토트넘은 해당 순위에서 16위에 그쳤지만 이번 시즌엔 오로지 맨시티와 아스널만이 그들의 위에 있을 뿐이다.
경기의 주도권을 잡기 시작하면서 토트넘의 점유율 또한 상승했다. 토트넘이 프리미어리그 기준 현재 기록하고 있는 61.4%의 점유율은 리그에서 세 번째로 높은 기록이며, 토트넘이 22/23 시즌 기록했던 49.8%와 비교하면 비약적으로 상승한 수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토트넘은 파이널 서드에서의 공 소유권 탈취 부문에서도 첼시와 맨유에 이은 리그 3위를 기록했다. 공을 되찾을 때 상대방에게 허용한 패스 횟수를 기록하는 PPDA 부문(해당 팀이 얼마나 공격적으로 압박을 가하는지 알 수 있는 데이터이다)에서도 토트넘은 9회 만을 하용하며 리그에서 가장 낮은 수치를 보이고 있다. 22/23 시즌 토트넘이 13.8회를 허용했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장족의 발전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이 모든 긍정적인 발전을 오롯이 판 더 벤의 공으로 돌리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그의 가세로 토트넘이 보다 적극적인 전방 압박과 공격적인 자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에는 반박의 여지가 없다.
로메로는 판 더 벤 영입 이전 홀로 외로이 토트넘을 지탱하던 선수였다. 토트넘 입장에서는 단순히 뛰어난 기량뿐만이 아니라 로메로와 함께 뛰며 그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선수가 필요했다. 그리고 판 더 벤은 토트넘의 기대치를 거의 완벽하게 충족시키고 있는 중이다.
두 선수가 환상적인 궁합을 보이고 있는 이유는 두 선수의 상반된 수비 성향에 기인한다. 먼저 로메로는 매우 적극적인 수비 성향을 가진 선수이다. 도전적인 태클과 공격적인 압박으로 상대 공격수를 압박해 공을 탈취하는 것을 선호한다.
이는 상대 공격수에게도 부담을 줄 수 있지만, 공을 빼앗지 못했을 경우 상대 공격수에게 뒷공간을 내줄 수 있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판 더 벤은 이런 리스크를 완벽히 보완하는 플레이 스타일을 가졌다.
위 차트는 스포츠 전문 매체 ‘디 애슬레틱’이 책정한 22/23 시즌 판 더 벤의 스카우트 데이터이다. 차트를 살펴보면, 그가 수비수임에도 ‘Defensive’ 부문에서 점수가 극단적으로 낮은 것을 볼 수 있다. ‘디 애슬레틱’은 그가 수비수임에도 불구하고 다소 ‘자유방임적’ 플레이 성향을 갖고 있어, 데이터만으로는 그를 전부 알 수 없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디 애슬레틱’이 평가했던 것처럼 판 더 벤은 뒷 공간을 커버하거나 역습 상황에서 상대의 공격을 지연시키는 방식으로 경기에 임한다. 이렇듯 두 선수의 극단적으로 다른 플레이 스타일은 서로의 단점을 보완해 준다. 판 더 벤의 부족한 적극성을 로메로가 채워주고, 로메로의 적극성이 수반하는 리스크를 판 더 벤이 커버해 주는 것이다.
두 선수는 23/24 시즌 토트넘이 치른 프리미어리그 전 경기에 주전 센터백으로 출전해 9경기에서 8실점만을 내주며 토트넘의 우승 경쟁을 이끌고 있다.
토트넘은 과거 마우리시오 포체티노 감독 시대 이후 오랜만에 새로운 황금기를 위한 신호탄을 쏘아 올리고 있다. 포체티노 감독 시절의 토트넘은 주로 ‘DESK’ 라인을 필두로 하는 젊고 역동적인 공격력으로 대표되던 팀이었지만, 토트넘의 화려한 공격력 뒤에는 든든하게 팀을 받치던 알더베이럴트와 얀 베르통언의 센터백 조합이 있었다.
두 선수는 수년간 토트넘을 지탱했다. 두 센터백 듀오의 존재는 토트넘의 젊고 유망한 앞선의 선수들이 공격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였다.
그리고 다시 수년이 흐른 지금, 토트넘은 로메로에 이어 판 더 벤을 영입하며 다시 한번 황금기 시절에 버금갈만한 센터백 듀오를 구축했다.
판 더 벤 영입 당시 그가 프리미어리그에서 이만큼의 퍼포먼스를 보여줄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그 클럽이 작년에 리그에서만 63골이나 실점했던 클럽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그는 자신의 실력으로 당당히 팀의 철벽으로 우뚝 섰다.
물론 시즌은 길고, 토트넘은 이제 고작 9경기만을 치렀을 뿐이다. 하지만 더 이상 판 더 벤에게 의심은 실례가 되지 않을까. 다시 한번 말하지만 판 더 벤은 ‘시속 36km로 달리는 193cm의 왼발잡이 센터백’이다.
https://brunch.co.kr/@07bf8b7490bf4fa/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