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사가 되어/송현섭

동시 필사 16

by 이경아

내가 마법사가 되어


송현섭



내가 마법사가 되어

코스모스의 이름을 토끼로 바꿔 버리면

코스모스는 빨갛고 노란 얼굴을 흔들며

풀숲을 달려 굴속에 숨어 버릴 테고

놀라서 콩콩 뛰쳐나온 토끼들에게

"넌 코스모스야."라고 부르면

토끼들은 길가에 앉아 큰 귀를 흔들 테고

깜박 실수로 가시덤불을 늑대라고 부르면

신이 난 늑대는 길가의 토끼들을

차례차례 꿀꺽 삼켜 버릴 테고

그래서 너무 뚱뚱해진 늑대 한 마리가

외갓집으로 가는 길가에서

누런 이를 씩 드러내고 나를 기다릴 테지만

나야말로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호랑이로 이름을 바꾼 터라

늑대는 캐스터네츠처럼 이빨을 딱딱거리며

눈 깜짝 달아나 버릴 테고

어흥! 어흥! 어슬렁어슬렁

외갓집에 들어가

화들짝 놀란 외할머니를

등에 태우고

훨훨 훨훨 산을 돌면

마을 회관으로 우르르 몰려나온 사람들은

"와, 호랑이 무지개가 떴네"라고 말할 테지.



<내 심장은 작은북>中/창비


이름은 정체성이다. 이름을 들키는 순간 마법은 풀려버린다.

마법사가 되어 존재하는 것들의 이름을 바꿈으로써 바뀐 이름의 존재가 된다.

이름에 걸맞은 행동을 한다.


이름을 가지고 꼬리 따기 형식으로 계속 변모하는 모습을 그리는 재밌는 시다.

코스모스-토끼

가시덤불-늑대-토끼를 먹은 뚱뚱한 늑대


이 늑대가 나를 잡아먹으려고 버스에서 내리는 나를 기다린다.

나는 호랑이로 이름을 바꾼 상태

늑대가 도망가고

호랑이가 된 나는 할머니를 태우고 하늘을 날고

무지개가 된다


나는 무엇이고 될 수 있다.

이름만 바꾸면 된다. 우리는 늘 마법사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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