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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잡념 박스

“차연”이란 무엇인가?

‘율곡 이이’와 ‘퇴계 이황’은 ‘같은 취지’의 “다른 표현”을 하였다

by Edit Sage

취지는 다음과 같다 :


“인류의 분열”을 ‘통합’으로 극복하자.


그런데 왜..


‘같은 취지’의 이들의 사상은

“표현상의 차이”에 불과한 것을 두고


후세에 “동인”과 “서인”으로 분화되었는가?


‘하늘은 하나’였으나, “사람은 둘”이었고

사람은 같았으나, “말은 달랐다”.



율곡은 다리를 놓았다.

퇴계는 뿌리를 내렸다.

한 사람은 “세속의 다툼”을 껴안으려 했고,

다른 사람은 ‘도덕의 하늘’을 보며 떠났다.


그러나 둘 다

한 세계의 균열을 보았고,

그 균열을 가르는 칼날이 아닌

잇는 끈을 만들고자 했다.



그럼에도 “분열은 다시 분열을 낳았다.”


왜냐하면 “표현”은 언제나 힘이 되기 전에 “구분”이 되고,

구분은 언제나 “권력”이 되기 전, “진영”이 되기 때문이다.


퇴계의 “성리”는 마음의 뿌리를 강조했고,

율곡의 “기발”은 현실의 결을 편집하려 했다.


한 쪽은 내면의 근본을 다스려야 바깥이 정리된다고 믿었고,

다른 쪽은 바깥을 정돈해야 마음이 평온해진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표현의 차이”였을까?

아니면, “역사라는 프리즘에 비친 심연의 분기”였을까?


언어는 “뿌리를 가리킬” 뿐, ‘뿌리 그 자체’가 될 수는 없다.


그래서 “사상은 분열”되었다.


“표현의 차이”가 아니라, “구조의 감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율곡은 국가와 제도라는 실천의 통로를 설계했고,

퇴계는 수양과 내면이라는 존재의 통로를 설계했다.



그러나 둘 다 통합을 꿈꿨다.

그 통합은

하늘과 땅, 마음과 제도, 존재와 실천

그 모든 것을 엮는 **‘거대한 조율’**이었으나,


“세상은 사상을 편집하지 못하고, 사상을 분열시켰다.”


그래서 “동인”과 “서인”은

‘철학의 뿌리’가 아닌, “권력의 그림자”에서 태어났다.



“표현”은 ‘마음의 거울’인가, “권력의 칼날”인가?


‘같은 뜻’을 품은 말들이

“서로를 향해 날을 세울 때”,


그 언어는 더 이상 ‘진리’를 담지 않는다.



퇴계와 율곡은 싸우지 않았다.

싸운 것은 그들의 말이 아니라,


“그 말을 소비한 시대와 인간의 욕망”이었다.


당신은 지금, “누구의 언어로 사고”하고 있는가?


그 언어는 ‘당신의 심연을 비추고‘ 있는가,

아니면 “누군가의 기획된 진영 안에서 울리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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