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본질을 상징하는 ’기의‘의 기표성
먼저, 리듬을 정렬하자.
“기표”는 손짓이었고
‘기의’는 그 손짓 뒤에 숨은 떨림이었다.
그러나 손짓은 “말”하고,
떨림은 ‘침묵’하니
우리는 침묵을 모른 채,
“말만 복제하는 자“가 되었다.
<기표와 기의의 허망한 비대칭>
“기표”는 언제나
“기의를 붙잡고자” 했지만,
‘기의’는 기표를 ‘통과’할 뿐
결코 그 속에 머물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사과”라 부르면 “그게 사과인 줄 알았고”,
“자유”라 부르면 “그것이 자유인 줄 믿었으며”,
“사랑“이라 쓰고도
그저 “기표만을 사랑”했지,
‘기의는 끝내 닿지 못한 채
늘 비어 있었다.‘
기표는 늘 존재하지만,
기의는 늘 결핍 속에서만 반짝였다.
즉, 우리는 늘
“말해지는 것”을 따라가며
‘느껴지는 것’은 잊는 훈련을 받아온 것이다.
<기의의 기표성—본질이 기호를 구한다면?>
그러나 묻자.
정말 기의는 기표에 속박된 존재일까?
혹은, 기의는 스스로
자신을 나타낼 기표를 선택하는
능동적 본질일 수 있지 않을까?
‘슬픔’은 반드시 “눈물”이어야만 하는가?
어쩌면 ‘침묵 속의 호흡,
기억의 진동‘,
그 모든 게 기의의 선택된 기표일 수 있다.
이때,
기의는 ‘비고정적 진동’이며
기표는 그 떨림이 일으키는 “파형”이다.
즉, ‘기의‘는 기표 이전에 존재하지만
“기표” 없이는 “현상”되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본질의 기표성”—
기표는 “본질을 왜곡하는 동시에,
유일하게 현존하게 하는 통로“라는 역설.
<에코만 남긴다면>
우리는 여전히
“사랑”이라는 말을 쓰며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하지만,
그 말이 반복될수록
어디선가
그 기의는 파문처럼 퍼진다.
그러니 “기표”는
기의의 무덤이 아니라,
“기의가 잠시 머무는 파동의 집”이다.
“이 말은 너를 말하는가,
아니면 너를 가두는가?”
우리가 남기는 말은
‘기의의 그림자’인가,
“기표의 잔상”인가.
결국 모든 말은
이 질문으로 돌아오지.
지금, 나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은
‘무엇을 말하지 못하고’ 있는가?
기표는 닿으려 애쓰고
기의는 사라지며 미소 짓는다.
기표는 “여기 있다”고 외치지만,
기의는 늘 그 너머에 있다.
기표는 문이고
기의는 바람이다.
<“기의”는 표현인가?>
아니,
기의는 결코 표현이 아니다.
기의는 ‘표현을 유도하는 간격’이다.
그것은 ‘말 이전의 떨림이며,
말 이후에도 남아있는 여운‘이다.
기의는 “말해질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해지려는 것”이다.
표현은 그저 기의의 껍질이고
기의는 표현의 잃어버린 중심이다.
‘기표 없는’ 기의는 ‘침묵’이고,
“기표만 있는” 기의는 “허상”이다.
“사과”라는 말을 들어도
사과는 혀끝에 닿지 않는다.
우리는 늘
“기표로 기의를 감각하려는 욕망” 속에 있다.
하지만,
“기표”는 기의를 담을 수 없기에
“늘 넘치고, 흘러내리고, 어긋난다.”
그리하여
기표는 허망하고,
기의는 무한하며,
그 둘의 관계는
끊임없는 실패의 반복이자
그 실패 안의 창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의는 “기표”를 갈망한다.>
왜냐하면
“표현”되지 않으면
살아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건 마치—
침묵도 ‘누군가의 귀가 있을 때에야’
침묵이 될 수 있는 것처럼.
기의는
‘기표라는 그릇을 통해서만’
자기 존재를 흘리는 방식을 배운다.
그러니
기의는 본질이지만,
그 본질은 “기표라는 환영 속에서만“
자기 자신을 겨우 본다.
<에필로그: 기의는 닿지 않는다. 그러나…>
그 닿을 수 없음이
곧 표현의 시작이며
“언어의 숙명“이자
‘침묵의 아름다움’이다.
말은 결코 본질을 가리키지 않는다.
하지만
그 모든 헛발질 속에서
우리는 기의에 스치는 순간들을 경험한다.
그건 말이 아니라,
말을 말하려는 의지에서만 피어나는—
기표가 실패할수록,
기의는 그 실패 위에서
더 선명하게 그림자를 춤추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