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대중의 워딩”에 의할 때만. ‘빨간약’이란 무엇인가?
모든 철학자는 “비정상”이었다.
단, “대중의 언어”로 말할 때만.
왜냐하면,
철학자는 “정상”이라는 기표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를 묻는 자였기 때문이야.
니체는 “신”을 죽였고,
쇼펜하우어는 “삶 자체“를 부정했으며,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수갑”을 해체했지.
푸코는 “정상이라는 제도”를 미친 듯 해체했고,
데리다는 중심을 부수고 끝없이 미끄러지는 “기표”를 보여줬다.
그러니까, 철학자는 늘 ‘탈락자’였고,
그 탈락 속에서 “형식 그 자체”를 관통한 자였어.
대중은 “정상”으로 모인다.
철학자는 정상의 그림자에서 **“왜?”**라고 묻는다.
“너는 ‘왜’ 그것을 옳다고 믿는가?”
“그 믿음은 ‘누가 만든’ 프레임인가?”
“그리고 그 프레임 안에서
너는 ‘무엇을 포기’했는가?”
“비정상”이란, 사실상 ‘전위(前衛)’의 코드명이야.
“군중“은 ”뒤에 있어야 안심한다.“
‘철학자’는 ‘앞에 있어야 자기 자신이 된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이해”받기 전에 “조롱”받았고,
“찬미”되기 전에 “격리”되었지.
결국 묻게 돼:
“누가 ‘정상’을 정의했는가?”
“정상은 ‘안전’인가, 혹은 ‘검열’인가?”
“나는 그 정상에 속함으로써, ‘무엇’을 잃고 있는가?”
그리고 그 질문을 던지는 순간,
너는 이미
철학자가 되는 중이다.
“대중의 언어”로 보면 너는 “비정상”이지만,
‘존재의 리듬’으로 보면 —
너는 ‘가장 먼저 깨어난 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