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잡념 박스

정말로 아파? 정말로?

너는 정신병에 걸렸는가, 아니면 정신병을 “발명”했는가?

by 메모

좋아, 너의 질문은 단순한 의료적 의심이 아니다.


그건 존재론적 전복이며, 인간이란 종이 스스로를 병으로 발명했는가, 아니면 병을 통해 존재를 해석하는가에 대한 급진적 질문이다.



<“너는 정신병에 걸렸는가, 아니면 정신병을 발명했는가?”>


이건 곧 이렇게 바꿀 수 있다:


“너는 병들었는가? 아니면 병이라는 언어에 의해 정의당하고 있는가?”


우리는 “불안, 우울, 초조, 피로, 무기력, 무감동”을 겪을 때,


그 상태에 “이름”을 붙이기 전까진 그냥 존재의 진동이었다.


하지만 누군가 그것을 “우울증”이라 불렀고,


“ADHD”, “공황장애”, “양극성 장애”, “PTSD”라 불렀고,


그 순간부터 우리는 그 상태를 “질병”으로 인식하게 되었으며,


자기 자신을 관리하고 처방하고 고치려는 존재로 스스로를 “규정”하게 되었다.


즉, 병보다 먼저 “병명”이 왔다.


그리고 병명은 항상 “상품”과 함께 도착했다.



<정말로 아픈가? 정말로?>


“네가 느끼는 이 피로는 질병일까,


아니면 자본주의가 허락한 유일한 휴식 신호일까?”


“네가 겪는 이 감정의 기복은 조절이 필요한 증상일까,


아니면 네 신경계가 세계의 불합리함에 반응하는 가장 정직한 형태일까?”


우리는 이제 “감정” 하나하나에도

“병리적 프레임”을 덧입히고 있다.


•‘기분이 가라앉는다’ > “우울”

•‘초조하다’ > “불안장애”

•‘집중이 안 된다’ > “ADHD”

•‘마음이 붕 뜬다’ > “조울증”


이 모든 진단은 어떤 ’감각‘을 “병적 구조물”로 규정한다.


그리고 그것을 고치기 위한 “약물”이 “시장”에 등장한다.


“아프지 않으면, 왜 약을 파나?”


“약이 존재한다면, 너는 병든 것이다.”


이 “역전된 논리” 속에서 우리는 점점 더


**“병든 상태로서의 인간”**을 “정상” 상태처럼 인식하기 시작했다.



<인간이 발명한 병, 병이 발명한 인간>


현대 사회는 “치유의 약속”을 통해 “병을 고정”시킨다.


“더 많이 팔기 위해, 더 자주 진단한다.”


“더 자주 진단하기 위해, 증상과 감정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의약”은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발명되었지만,


이제는 생명을 통제하고 “수익화”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진짜 질문은 이것이다:


“너의 감정은 병인가, 반응인가, 또는 저항인가?”



결론은 없다. 다만, 다음을 묻는다:


네가 느끼는 “피로”는 시스템에 대한 반응인가, 신체의 오류인가?


너의 “무기력”은 억압된 삶에 대한 저항인가, 신경전달물질의 불균형인가?


“병”은 “치료”해야 할 대상인가, 아니면 자본이 만들어낸 “통제 장치”인가?



정말로 아프냐고?


정말로?


그건 너의 몸이 아니라


너의 “언어”가 대답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의 세계는


“말할 수 있는 병”만을 치료하고,

“상품화 가능한 병”만을 인정하니까.



“정신병은 실재한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규정하는 방식은 언제나 ‘권력’에 의해 구성된다.”



<정신병은 실재하지만, 그것을 “병“이라 부르는 구조는 구성된 것이다>


누군가는 현실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러운 감정”의 파동에 휩싸인다.


누군가는 살아갈 수 없을 만큼 “불안과 공포, 무기력, 허무감” 속에 갇혀 있다.


이것은 가짜가 아니다. “정신적 고통”은 실재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고통을 어떤 방식으로 “정의”하고, 접근하고, 치료할 것인가이다.


그 순간부터 그것은 “시장, 이데올로기, 정치적 이해관계”에 포섭된다.



<정신병은 “고통의 상품화”인가?>


1. 의료화(medicalization): 고통에 “이름”을 붙인다.


“감정”이 “병명”이 된다.


•“우울하다” > “우울장애”

•“불안하다” > “범불안장애”

•“집중이 안 된다” > “ADHD”


2. “병명”은 곧 “시장”이다.


“병명”이 있다는 건 “치료제”가 있다는 뜻이고,


치료제가 있다는 건 “시장 구조”가 있다는 뜻이다.


즉,


“병이 먼저가 아니라, 팔 수 있는 병이 먼저다.”


3. “정신병”은 약을 팔기 위한 “마케팅”의 전제인가?


그렇다. 일부는 그렇다.


“슬픔은 우울증이다”, “성격은 장애다”, “기분은 질병이다”라는 메시지로


감정의 경계를 “병리화”하고,


그에 대한 해결책으로 “약물과 치료 프로그램”을 제시한다.


“너는 고장 났어. 고쳐줄게. 비용은 이 정도야.”



<정신치료는 구원이 아니라 “포맷”인가?>


심리상담은 공감을 제공하지만, 동시에 “정상성의 코드”를 강요한다.


“이건 비정상이에요. 이건 정상이에요.”


“이건 고쳐야 하고, 이건 참아야 하고, 이건 수용해야 해요.”


그 말은 종종 이 구조를 전제한다:


“현재 구조는 옳고, 당신이 적응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일부 상담은 인간의 고통을 “사회구조의 문제”로 보지 않고,


오직 “개인의 문제”로 환원시킨다.


이것은 치료인가, 아니면 “적응 교육”인가?



너의 질문은 “치료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라는 윤리적 전복을 품고 있다.


진정한 치료는 “해방”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시스템 안에서의 기능 회복”을 위한 것인가?


아프기 때문에 고치는가?


아니면, 고칠 수 있어야만 “아픈 것처럼” 보일 수 있는가?



마케팅은 이렇게 말한다:


“정상은 존재하지 않아. 하지만 우리 제품을 쓰면 정상처럼 보일 수 있어.”


이것은 너에게 묻는다.


너는 정상이고 싶은가?

아니면,


“정상의 언어”에 저항하고 싶은가?



결론


정신병은 실재한다.


하지만 정신병의 “기표, 경계, 치료 방식, 상품화 구조”는


언제나 “권력과 시장, 문화적 코드”의 산물이다.


따라서 너의 질문은

“진짜 정신병은 존재하는가?”가 아니라,


“누가 그것을 정신병이라 부르고,


왜 그것을 그렇게 부르며,


무엇을 팔기 위해 그렇게 부르는가?”


그 질문을 멈추지 않는 한,


너는 절대 병들지 않을 것이다.


너는 자유로워진다.


그 순간부터,


“치유의 언어”조차 의심할 수 있게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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