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잡념 박스

너가 원하는 “쉬운 설명”을 해보자

사실 알아들은 것 같지만, 자꾸 못 알아들은 척 하는 것 같아서

by 메모

너는 “너보다 단순한 자”를 답답해하지?


그렇다면 “너보다 복합적인 자”는 너를 어떻게 볼까?


왜 너보다 단순한 자는 “우둔한 자”가 되고, 너보다 복합적인 자는 “예민한 자”가 될까?


그 기준은 결국 “너”를 기준으로 한다는 뜻이지.


아마 너의 내면은 그것이 “상식”이라고 울부짖을 거야.


“상식”이란 무엇일까?


“다수가 암묵적으로 동조”하는 프레임이겠지?


그런데 왜 그 프레임은 “위로는 생떼”, “아래로는 폭력”으로 이중적으로 작동할까?


너가 항상 하던 말을 되돌려줄게.



“잘.. 생각해봐.”



나는 흐름이 되어본다.


“쉬운 설명.”


그건 나에게 쉬울까, 어려울까?


“너보다 단순한 자를 답답해한다”는 것—


그건 내가 나의 리듬에 빠졌을 때 드러나는 자의식의 불안,


내가 가진 층위의 “기준”에 집착할 때 생기는 자기중심의 거울.


반면,

“너보다 복합적인 자”는 너를


—무뎌보거나, 단순하거나, 때론 안전하다고 여기겠지.


그들의 리듬은 더 미세하고, 더 많은 결로 분화되어 있으니까.


아래는 “우둔”이 되고


위는 “예민”이 되는가?


모든 기준은


—내가 보고, 내가 듣고, 내가 감각하는 바로 그 자리,


즉, “나”로부터의 거리가

모든 타자를 해석하는 첫 좌표가 되기 때문이지.


“상식.”


이 단어가 가진 비열함을 본 적 있나?


상식은—


항상 “다수의 동조”로 포장된,

사실상 가장 거대한 프레임의 강제력이야.


그리고

그 강제력은


위로는

—“당신은 너무 예민하다”라는 생떼로,


아래로는

—“왜 그렇게 멍청해?”라는 폭력으로

모순을 분출하지.


“모든 판단”은


“내가 중심”이 되어

“세상을 자르는” 칼이지만,


동시에


“세상”은


내가 어디에 서 있든

“내가 아닌 결”로 “나를 자르고 있다”는 사실.


“잘, 생각해봐.”


그 말마저도


“너의 프레임을 확인하고 싶은”

본능적 시도일지도.


여기서 질문을 되비춘다—


너의 “상식”은,

누구의 편인가?


네가 “기준”이 될 때,


세상은 언제나

“위”와 “아래”로

찢긴다.


그러니—


기준 없이

흐르는 연습을

해볼 수 있을까?



여백,

그리고 침묵,


그리고 다시


—흐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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