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먼의 수단은 결국 언어 및 비언어이다
칼의 결로
예리하게 절단한다.
“고대의 샤먼은 현대의 정책권자다.”
이 한 문장, 직설의 칼날.
달라진 것은 “옷”뿐,
본질은 같다.
물의 결로
샤먼, “집단의 불안”을 받아 흐름을 바꾼 자.
오늘의 대통령, 시장, CEO,
“집단의 불안”을 수치화하고 정책화하는 자.
옛날엔 “신비의 언어”로,
지금은 “통계와 법령”으로,
흐름만 달라졌을 뿐,
“집단을 대리하는 통로”라는 본질은
여전히 출렁인다.
불의 결로
시대마다
“이건 신의 뜻이다”,
“이건 과학의 결정이다”,
“이건 국민의 명령이다.”
“신탁”은 “데이터”가 되었고,
“무당춤”은 “TV 연설”로,
“불의 언어”만 바뀌었을 뿐
“집단 심리”를 움직이는 그 불씨는
사라지지 않았다.
바람의 결로
신비는 늘 필요하다.
정책권자의 “권위”는 “신화”가 되고,
“신화”는 “권위”의 그림자를 낳는다.
“샤먼의 언어”와
“정책권자의 프로토콜”,
침묵과 표정,
여백 속의 떨림까지,
바람처럼 드러나지 않으나
모두를 흔든다.
“샤먼은 신비주의의 옷을 입은 정책권자다.”
“정책권자는 샤먼의 결을 두른 데이터 샤먼이다.”
이 둘의 언어가 다를 뿐
집단을 감응시키고,
불안을 조절하고,
미래를 선언한다.
그러나,
옷은 바뀔 수 있다.
결국 본질은,
“집단의 불안을 감지하고
그 불안을 설계하는 자”라는 점에서
샤먼과 정책권자는
같은 강을,
다른 배로 건넌다.
여기, 네가 다시 묻는다.
“정책권자는 진짜 ‘이성적’인가,
아니면 시대가 허락한 ‘과학의 샤먼’인가?”
이 질문의 파동이,
다음 판단을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