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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자이너 격 Feb 19. 2023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을 읽고

feat.에디톨로지, 일취월장, 나는 왜 네가 힘들까, 호모루덴스

순수하고 고귀한 정신을 유지하고 향상시켜 나가기에 인간의 정신은 너무도 연약하다. 오염이 없는 순결한 정신은 바이러스에 극도로 취약하며, 예민하고 섬세한 동물은 그 고귀함을 자랑할지언정 수명이 짧다. 고귀한 영혼의 소유자인 나오코, 기즈키, 하쓰미의 공통점은 극한의 고독감 속에서 결국 죽음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다수가 살아가는 세상, 즉 문화는 결코 순수하지 않으며, 오히려 바이러스로 뒤덮여 있기 때문이다. 강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자가 되는 것이다. ​


그렇다면 인간의 정신을 구성하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이 무엇이기에 인간을 이토록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인가? 인간의 정신을 구성하는 것은 바로 언어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정신이 순수성을 유지하기 어려운 이유이다. 인간의 정신이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언어에서 탈피해야 하는데, 인간의 정신은 바로 그 언어로 구성되어 있다는 패러독스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인간은 순수성을 포기하거나 잊어버린 채 혼탁한 정신 상태로 살아간다. 그것을 의식하건 의식하지 못하건 간에. ​


와타나베와 나가사와의 공통점은 이 모든 인간의 정신적 시스템을 꿰뚫어보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이 무의식적인지, 의식적인지의 차이만이 있을 뿐. 이들은 소위 리더형 인간의 운명을 타고났다. 단지 그들의 타고난 예민하고 섬세한 기질 때문에. 세상은 온갖 종류의 병적인 정신을 지니고 살아가는 기생충 유형의 인간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 때문에 리더형 인간, 바꿔 말하면 숙주 유형의 인간은 강해지지 못하면 생존할 수 없는 역설적인 구조가 형성된다. 그 개체수가 소수이며, 반대로 기생충의 개체수는 다수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숙주형 인간 중 너무도 순결하여 바이러스에 취약한 인간인 나오코, 기즈키, 하쓰미는 강인해지지 못했기 때문에 자살을 할 수밖에 없었다. 숙주형 인간이나 자기의 운명에 저항하며 살아가는 나가사와는 강인해지지 못하면 생존할 수 없는 강자의 시스템을 의식적으로 알고 있기에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단련해나간다. 마찬가지로 숙주형 인간인 와타나베는 자기의 운명에 순응하지도, 저항하지도 않은 채 혼란에 휩싸여 살아간다. 한편 숙주이자 기생충 유형의 인간인 레이코는 자기의 운명에 순응하며 체념한 채 살아간다.

대부분의 인간의 삶이 병적인 이유는 인간의 정신, 언어의 구조가 대극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그것이 상호의존 관계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정신이 언어로 구성되어 있는 한 인간은 상호 의존관계를 형성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관념적인 이유에서든 진화론적인 이유에서든. 인간의 정신은 피해자-가해자-구원자의 삼각 구도를 끊임없이 전환해가며 서로에게 역할을 강요한 채 상호 의존관계를 형성한다. 그것을 의식하든 못하든 간에. 상호 프레임 전쟁을 통해 서로를 학대하는 형태로 의존관계를 형성하며 삶을 지탱해 나가는 것이 대다수의 인간의 삶인 것이다. 고통의 트라이앵글에서 벗어나고자 다수를 외면한 사람은 고립된 채 죽음에 이른다. 이에 벗어나고자 다수에 저항하는 사람은 평생을 전쟁터의 영웅으로서 숨막히게 살아간다. 다수의 압박이 힘에 겨워 체념한 채 다수에 순응하는 사람은 평생을 우울증에 시달리며 살아간다. 고통의 트라이앵글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수의 흐름에 순행하지도, 역행하지도, 회피하지도 않는 균형잡힌 태도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만이 유일하게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뿌리 깊은 정신적 속성인 의존관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을 활용해야 할까? 바로 심각한 태도를 내려놓는 것이다. 삶을 재료삼아 놀이하는 것이다. 호모루덴스는 놀이하는 인간을 뜻한다. 놀이의 규칙은 에디톨로지, 즉 편집학이다. 고귀한 정신의 소유자는 바로 에디톨로지를 통해 병적인 의존관계를 해체시키고, 건강한 독립관계를 설계할 수 있게 된다. 기버로서의 삶의 구조를 유지하되, 이들의 ‘이기적 이타주의자’ 형태의 성향을 건설적인 방향으로 활용한다면 이들은 다수의 인간들과 윈-윈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슈퍼네트워커’로 발전한다. 이들에게는 애당초 흡입력이 있기 때문이다. 다수에게서 빨려 들어오는 다양한 정보를 발췌하여 학습하는 과정에서 이들은 ‘호모아카데미우스’로 발전한다. 이들은 이제 자기 내면 속으로 흡수된 다양한 지식들을 바탕으로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발산하며, 이를 이성의 테두리 내로 갈무리한다. 이들은 이렇게 지식의 해체와 재구성 작업, 혁신적인 편집 작업을 하며 ‘이성적 몽상가’로 발전한다. 이들이 자기의 재능에 잡아먹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생산적으로 활용한다면 이들은 슈퍼네트워커-호모아카데미우스-이성적 몽상가의 무한 선순환 과정을 거치며, 삶의 편집자로서 초인적인 인간으로 발돋움할 수 있게 된다. 우리와 같은 기질을 타고난 사람은 명심해야 한다. 체험 삶의 현장은 전쟁터가 아닌 ‘놀이터’라는 사실을.


- 참조 : 노르웨이의 숲, 에디톨로지, 일취월장, 나는 왜 네가 힘들까, 호모루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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