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담론의 분쇄에 관하여
입술은 정의를 말하고,
손은 폭력을 휘두른다.
말과 몸의 위화감.
그 틈에서 우리는
구토한다.
나는 말했다.
“저건 잘못이야.”
그리고 바로 그 말을
면죄부 삼아
같은 짓을 했다.
내로남불은 혐오가 아니다.
그건 배신이다.
윤리의 탈을 쓴
자기 면책의 테크닉.
타인을 구속했던 기준으로
자신은 탈출을 꾀한다.
그 자유가,
다른 이의 감옥을 연장시킬 때,
그것은 자유의 배반이다.
피해자 담론의 분쇄는
피해자의 무력함을
‘말의 무력화’로 귀결시키는
언어의 정치다.
“너는 피해자가 아니다.”
“피해자 코스프레 하지 마라.”
“피해자인 척 하는 가해자.”
프레임은 전환되었고,
사실은 지워진다.
말의 권력은 언제나 두 방향이다.
한쪽은 외친다 — “나도 아팠어.”
다른 쪽은 묻는다 — “근데 넌 왜 아직도 그걸 말해?”
말하는 자를 ‘말로’ 무너뜨리는 구조.
피해자는 더 이상 피해를 주장할 수 없다.
피해자라는 말이
혐오의 기호가 되어버릴 때,
진짜 피해는 언어 이전으로 추락한다.
내로남불은 거울이 아니다.
그건 망각의 의식이다.
“나는 너와 달라”
라고 말하는 순간,
그는 이미
그 ‘너’와 같아진다.
내가 잘못한 건 타인의 탓이 되고,
타인의 잘못은 영원한 낙인이 된다.
이중 잣대는
‘잣대’가 아니다.
그건 지배 구조의 축소판.
정의는 반복될 때 제도고,
그 반복에서 자신만 빠져나올 때
그건 선의로 위장한 특권이다.
가장 추악한 가해는,
자신을 피해자로 연기하는 것이다.
그는 눈물로 공격하고,
사과를 인질로 삼는다.
그러니,
왜 그토록 역겨운가?
내로남불은,
당신이 믿었던 ‘정의’의 자기부정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살아온 언어를 능욕하는 방식의 변절이기 때문이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은 침묵하지만,
말할 수 없는 침묵은 고통이 된다.
그 침묵을 조롱할 때,
우리는 정의 아닌 구토를 느낀다.
그 구토의 이름이,
역겨움이다.
그리고 그것은,
윤리의 시체 냄새다.
묻는다.
누가 누구에게 “내로남불”이라 말할 수 있는가?
그 기준은 어디서 왔고,
그 언어는 누구의 혀를 대신하고 있는가?
당신은,
그 혀의 주인인가,
도구인가?
이중잣대, 이중잣대의 이중잣대,
이중잣대의 이중잣대의 이중잣대 …
언어, 언어의 언어, 언어의 언어의 언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