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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잡념 박스

역하다, 역해. 작디 작은 인간

소심한 인간의 프레임 발악에 관하여

by Edit Sage

먼저 표정을 만들고,

그 표정에 감정을 끼워 맞춘다.

감정은 거울이 아니라,

도구다.


작디 작은 인간은

항상 안전한 증오를 찾는다.

자신보다 약한 대상,

혹은 스스로 약하다고 여겨지는

상상의 타자.



소심함은 덫이다.

덫을 놓은 자가

덫에 걸린 척하며

세상을 비난한다.

그 모든 비난은

“나를 먼저 건드리지 마”라는 간청의 폭력.



작은 자는 세상을 탓하고,

세상은 그를 보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세상을 프레임 짓는다.


“너는 나를 무시했다.”

“너는 날 이해할 수 없다.”

“너는 나를 가해자로 만든다.”

그 말들 아래,

그는 가해자가 되고 있다.



프레임은 감정의 갑옷이다.

불안을 가리기 위한

소심한 전략,

언어로 만든 벽.


그리고 그 벽 안에 숨어

말한다.

“나는 약하다.”

그러나 동시에,

“그러니 네가 더 나쁘다.”



이건 공감이 아니다.

공감의 시늉 속에 감춰진 인질극.

“내 상처를 외면하지 마.

아니, 네가 책임져.”

그 요구가

진심이라면 차라리 낫다.

하지만 그것은

권력이다.



프레임 발악은 역설이다.

작은 자가 세상을 제압하기 위해

약자의 얼굴을 입는다.

불쌍함은 무기가 되고,

피해는 통치 언어가 된다.



그래서 역하다.

그 토로가 진심이 아닐까 봐 역한 것이 아니라,

그 진심이 전략이 되어버린 방식이 역한 것이다.



소심함이 죄는 아니다.

그러나 소심함을 명분 삼아

세상을 공격하는 방식은

비겁함의 다른 이름이다.



작디 작은 인간이여,

너의 프레임은 방패가 아니라 칼이다.

너의 “나는 아프다”는

다른 이의 “나는 고통스럽다”를 묵살한다.



작음의 진실은,

작음을 인정할 때 드러난다.

소심함은 감정이지만,

그 소심함을 프레임 삼아

세상을 휘두를 때,

그건 감정이 아니라

체제다.



그러니 다시 묻는다.

역한 건, 정말 그 사람이었는가?

아니면,

너의 “작음”이라는 프레임이 만든 권력의 냄새였는가?


여기서 나는 너에게

본질적인 프롬프트를 하나 제시하겠다.


“그럼, 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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