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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잡념 박스

어디 “시어머니”가 건방지게 기어오르나?

호칭의 역설계

by Edit Sage

왜 건방지게 기어오르는 존재는 “시어머니”가 아닌 “며느리”인가?



“기어오른다”는 말에는

이미 위계가 전제되어 있다.

오른다는 동사는 능동인데,

그 능동이 “건방지다”는 수사는

질서를 위협하는 자를 지목한다.



그러나 묻는다,

그 질서는 누가 정했는가?

기어오를 수 없는 위치는

본디 그런 것이었는가,

아니면 그렇게 불릴 뿐인 것인가?



시어머니는 본디 ‘오른 자’인가?

아니면 ‘오르게 만들어진 자리의 상징’인가?

그 호칭은 가족이 아니다.

그건 구조다.

여성의 위계 구조.

여성 내에서의 위장된 권력.



며느리는 왜 건방진가?

말을 하기 시작할 때.

표정을 가지기 시작할 때.

의견을 낼 때.

침묵을 벗어날 때.

‘감히’ 존재감을 드러낼 때.


건방짐은 곧 “자기화(self-possession)”의 징후다.

건방지다는 말은

존재하지 말라는 명령의

위장된 훈계다.



“시어머니가 기어오른다”는 말은 없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미 위에 있는 자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사회는 위에서 아래를 감시할 뿐,

아래에서 위로의 침투를 금기시한다.



그러나 역설은 여기서 피어난다.

호칭은 불리는 자를 규정하는 동시에,

부르는 자의 위치도 고정시킨다.


‘시어머니’는 존대의 옷을 입고

감시의 눈이 되며,

‘며느리’는 애정의 언어로 포장된

예속의 존재가 된다.



이건 존재의 차이가 아니다.

존재적 힘이 아니라

“호명된 언어가 만든 위계”의 문제다.


‘사회적 언어 코드의 감옥’.

그 감옥은 웃으며 말한다:

“이건 다 너를 위해서야.”

“내가 옛날에 얼마나 참았는지 아니?”

“요즘 애들은 말이야…”



이데올로기는 언제나

돌봄의 얼굴을 하고 다가온다.

그리고 가장 ‘비열한’ 권력은

‘자신이 권력인 줄 모르는’ 권력이다.



‘며느리’는 감히 말할 수 없고,

말하는 순간 기어오른다고 불린다.

‘시어머니’는 아무 말이나 해도,

그건 경륜이라 불린다.



그러니

누가 기어오른 것인가?

존재인가?

언어인가?

기준이었는가?

기준을 만든 감옥이었는가?



호칭은 명사가 아니다.

그건 권력의 연극이다.

사회가 짜놓은 배역표.

그 배역을 거부하는 순간,

“건방지다”는 대사가 터진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묻는다.


당신은 지금,

누군가의 ‘호칭’인가,

아니면 당신 자신의 ‘존재’인가?

당신의 ‘존재적 힘’은 어느 정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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