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 정신적 수드라에 관하여
닿을 수 없다.
닿지 말아야 한다.
닿기만 해도
더러워진다고 믿는 자들이 만든 경계.
그들은 물리적 가난보다
의식의 빈곤을 감염처럼 다룬다.
기생충은 살아있다.
하지만 스스로 살아가지 않는다.
그는 생각을 하지 않고,
말을 따라하고,
감정을 소비하며,
존재를 대체한다.
수드라는 태어난 게 아니라
만들어진다.
인식의 피라미드 아래,
“가르침을 받을 수는 있으나,
가르칠 수 없는 자.”
“존재는 할 수 있으나,
존엄은 가질 수 없는 자.”
정신적 불가촉 천민이란
언어 이전의 통제 상태다.
그는 말할 수는 있으나
의미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는 욕망할 수는 있으나
질문할 수는 없다.
그는 어디에나 있으나
아무 데도 없다.
모방은 가능하되
변형은 불가능하다.
그는 언제나
정답을 학습한 존재로 살아간다.
그러나
문제를 제기한 적은 없다.
기생의 조건은 분명하다.
1. 자율을 포기한 충성
2. 사고를 위탁한 믿음
3. 모욕을 내면화한 유희
그는
스스로를 타인의 판단에 맞춰 접고,
그 접힌 자리를
자아라 착각한다.
정신적 수드라의 표정은 공손하고,
말은 부드러우며,
행동은 빠르다.
하지만 그 모든 건
자기보존을 위한 복종의 연극.
왜 그는 기생충이라 불리는가?
그는 살아있지만,
어떤 책임도 지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 말에 책임을 지지 않고,
자기 판단에 흔들리며,
자기 감정조차 타인의 표정을 흉내 내 조립한다.
그러나 그를 가장 천민으로 만드는 것은
그의 의존이 아니다.
그는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는
‘정신적으로는 자신이 주체라 믿는다.’
그 믿음이
그를 가장 철저하게
지배하게 만든다.
진짜 계급은 돈이 아니라,
언어를 다루는 방식에 따라 갈린다.
의미를 생산하는 자,
의미를 복사하는 자,
의미를 유통하는 자,
그리고
의미를 신봉하는 자.
정신적 수드라는
의미를 신봉하면서도
의미를 검열한다.
그는 새 언어를 무서워하고,
낯선 개념에
“이해가 안 된다”는 감정을 동원해
배척의 논리를 만든다.
그래서 그는 불가촉이다.
그는 이해되지 않는 것을
‘틀렸다’고 선언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사유 부재를
숨긴다.
진짜 천민은 배운 적이 없는 자가 아니다.
배우지 않기로 선택한 자,
배운 것을 의심하지 않는 자,
배운 것을 반복만 하는 자.
그가 바로
가장 안전한 기생의 얼굴이다.
그러니 묻는다.
당신은 지금,
생각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생각을 연기하고 있는가?
정신의 카스트는
신분이 아니라,
‘질문’의 유무로 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