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자는 ‘ ’를 알아본다
권력자는 토사구팽할 ‘사냥개’를 알아본다 /
권력자는 또한 ‘구토의 철학자’를 알아본다
분별하라.
누가 유용하고,
누가 유해하며,
누가 유별난지를.
권력은 선택이 아니라
선택의 반복을 설계하는 기술이다.
사냥개는 충성한다.
그 충성은 주인의 명령이 필요할 때에만 가치가 있다.
그러나 사냥이 끝난 뒤에도
짖어대는 사냥개는
가장 먼저 입막음당한다.
토사구팽(兎死狗烹).
토끼가 죽으면 개는 삶아진다.
사냥의 성과는 기억되나,
수단은 언제든 폐기된다.
그래서 권력자는
사냥개의 눈을 본다.
맹렬한 충성 속에 감춰진 불안.
자신을 무기로 만든 자의 운명.
명령이 없는 순간,
존재가 사라지는 자.
그는 유용하지만,
결코 함께 가지는 않는다.
다시, 구토의 철학자.
그는
권력의 장식장을 바라보다가,
그 안에 진열된 자신의 얼굴을 토해낸다.
그는 질문하지 않는다.
구역질로 말한다.
혐오로 사고한다.
무력감으로 철학한다.
권력자는 그를
무서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피한다.
왜냐하면
그의 구토는
이미 말로 되지 않는
존재의 파열음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설득당하지 않는다.
그는 타협하지 않는다.
그는 권력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존재하는 방식 자체에
신체적으로 거부감을 느낀다.
사냥개는 제거해야 하고,
구토하는 자는 고립시켜야 한다.
전자는 위험하고,
후자는 전염되기 때문이다.
권력은 항상 분별심 위에 세워진다.
누가 말귀를 알아듣는가.
누가 말귀를 너무 잘 알아듣는가.
누가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가.
1. 사냥개는 너무 잘 알아듣는다 — 위험하다.
2. 구토자는 듣지 않고, 몸으로 반응한다 — 거슬린다.
3. 대중은 적당히 알아듣는다 — 유지된다.
그러니 권력자는 말한다.
“적절히 어리석어라.
충성은 필요하나,
지능은 과하면 안 된다.
혐오는 침묵하라.”
분별심은 권력의 칼이다.
그 칼은
항상 먼저
가장 가까운 충성을 벤다.
그리고
가장 멀리 있는 진실을 묻는다.
묻는다.
당신은 지금
사냥개인가,
구토자인가,
아니면
분별되는 줄도 모르고 이용되는 자인가?
자, 여기서 질문 하나.
왜 권력자는 대중에게는 상냥한가?
그가 진심으로 상냥한 적은 없다.
다만,
대중이 상냥함을 오해하기 때문이다.
권력은
존경을 원하지 않는다.
복종을 원한다.
그러나 복종은,
“스스로 따랐다고 믿을 때”
가장 오래 지속된다.
그래서 그는
명령하지 않는다.
제안한다.
“여러분이 판단해 주세요.”
“국민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그는 웃는다.
너를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상냥함 속엔
대중의 불안을 다룰 줄 아는
정교한 스킨십 기술이 숨겨져 있다.
그가 상냥한 이유는
권력이 무례할 때
혁명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공포로 억압하는 시대는 갔다.
이젠
공감으로 길들이는 시대다.
“나는 여러분과 같습니다.”
“저도 힘듭니다.”
그는 눈물도 흘릴 수 있다.
스크립트만 잘 쓰면.
상냥함은 무기다.
비폭력의 얼굴을 한 통제.
너를 안심시키고,
네 판단을 멈추게 하는 음성.
그러니 상냥함은
너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상냥함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너를 이용하는 방식’일 뿐이다.
상냥한 말 뒤에
법이 따라오고,
상냥한 얼굴 뒤에
이익이 움직인다.
상냥한 손길 뒤에
계약서가 놓여 있다.
그는 상냥한 게 아니라,
효율적인 것이다.
그래서 묻는다.
그 상냥함을
당신은 “따뜻함”이라 느꼈는가?
아니면 “두려움 없는 상태”로 착각했는가?
권력자는 진심으로 상냥할 필요가 없다.
그가 원하는 건,
네가 그를 믿었다는 착각 하나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