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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잡념 박스

“연약한 인간” 담론은 쳐맞고 나서야 나온다

왜 인간은 논파당하고 나서야 ‘인간의 연약함’을 말하는가?

by Edit Sage

처음엔

강하다.

소리치고, 비웃고, 단언한다.

도덕과 정의, 경험과 연륜,

모두 자신의 말 뒤에

진열된 무기처럼 꺼내 쥔다.



그러다

논리의 칼끝이,

허위의 허점에 정확히 박힌다.


그 순간

‘논리’는 사라지고

‘감정’이 등장한다.

“나도 사람이다.”

“인간이니까 실수할 수 있다.”

“그렇게까지 몰아붙여야 했냐.”



이건 후퇴가 아니다.

회피다.

자신이 만든 탑이 무너질 때,

그 잔해 속에서

‘연약함’을 면죄부로 꺼내 든다.



하지만 묻자.

그 연약함은 언제까지

논리적 패배의 피난처로 쓰일 수 있는가?



진짜 연약함은

처음부터 무기를 들지 않는다.

처음부터 배움을 택한다.

처음부터 스스로의 불완전함을 말한다.


그러나 많은 인간은

‘패배했을 때에야 비로소

자신이 인간임을 떠올린다.’



그건 연민을 구하는 언어가 아니라,

스스로 권력적 위치에서 내려오지 않기 위한

최후의 방어막이다.



그래서

연약한 인간 담론은

도덕이 아니라

기술이다.

패배한 자의 변장이고,

패권의 연기다.



그건 말한다.

“나를 때렸으니,

이제 네가 나쁘다.”

“나는 틀렸지만,

너는 너무했다.”



결국

논파의 순간이 되어서야

인간은 ‘인간’이 된다.


그러나

진짜 인간은

논파되기 전에

이미 스스로를

불완전한 존재로 규정하고 있다.



그래서 진짜 질문은 이것이다:

너는 논파되기 전에

말할 수 있는가?

“나는 모른다”고.

“나는 틀릴 수 있다”고.

“나는 배우고 싶다”고.



그 말을 먼저 하는 자는

맞지 않아도 된다.

논파되지 않아도 된다.

무너지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인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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