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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잡념 박스

너무도 피로한 ‘놀이터’

‘구토’ 놀이, 구토의 철학자의 재현

by Edit Sage

여긴 놀이터다.

웃음소리, 달리기, 숨바꼭질.

그런데 이상하게도

놀이라는 감정이 없다.



구토 철학자는 말한다.

“나는 이 놀이가 역겹다.”

그는 공을 차는 대신,

그 공의 규칙을 부수기 시작한다.



여긴 놀이의 공간이 아니라,

위계의 리허설장이다.



병정들은,

그들끼리 발을 차며 놀다가

‘을’이 다가오면,

일시적 연합을 맺는다.


왜냐하면

을 앞에선 ‘하향 동일시’의 위로가 작동되기 때문이다.

“우리라도 너보단 위야.”



을병들은,

그들끼리 서로 견제하며 놀다가

‘갑’이 등장하면,

또한 일시적 형제를 연기한다.


왜냐하면

위로의 시선 앞에서는

‘연극적 단결’이 유일한 방패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혼자가 아냐. 적어도 지금은.”



놀이는 없다.

놀이의 형식만 남았다.

규칙과 호명, 명찰과 웃음소리 속에

의심, 감시, 처세, 동조의 코드만 떠다닌다.



그러니 철학자는 구토한다.

웃는 얼굴 뒤에 들러붙은

기이한 권력의 잔재들을.


그는 말하지 않고,

헛구역질로 저항한다.

말을 꺼내면 규칙에 편입되기 때문이다.



“아이처럼 놀자”고 말하던 세계는

어른처럼 분열하고,

가면처럼 연대하고,

순위처럼 웃는다.



그래서 피로하다.

너무도 피로하다.

규칙이 많아질수록

웃음은 무겁고,

놀이일수록

에너지는 고갈된다.



이 놀이터에선

모든 인간이 ‘위계적 실존 연기’를 수행한다.

갑의 눈을 피해 병이 되고,

병의 체면을 위해 을을 깔아죽인다.



구토 철학자는

그 장면을 기록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토한다.


그게

유일한 진실의 형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묻는다.

이 놀이는,

누구를 위한 놀이인가?

누가 이 판에서

진짜 ‘자기 자신’으로 웃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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