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도 을도 아닌 병과 정의 소꿉놀이에 관하여
병은 병이다.
정은 정이다.
둘은 맞물려 놀고 있다.
정의라는 상징의 집을 짓고,
윤리라는 블록을 끼워 맞추며.
아이처럼 보이지만,
그 놀이는 너무 정교하다.
표정, 시선, 규칙, 제스처—
모든 게 내면화된 연출.
병은 말한다.
“나는 약자야, 하지만 옳아.”
정은 말한다.
“나는 중립이야, 하지만 네 편이야.”
그들은 각자의 의무를 다한다.
놀이의 문법 속에서.
그런데 그 놀이판은
스스로 굴러가지 않는다.
누군가는 무대를 깔고,
역할을 배치하고,
정의의 대사를 각본처럼 넣는다.
그가 **‘을’**이다.
을은 병정놀이의 연출자.
병의 분노를 윤리로 포장하고,
정의 중재를 명분으로 뽑아낸다.
그는 직접 놀지 않지만,
놀이라는 감정의 엔진을 조율한다.
“이건 맞고, 저건 틀려.”
“이 감정은 순수하고, 저건 불순해.”
을은 놀이의 신을 자처한다.
그러나—
그조차, 하나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 놀이를 기획한 자는
**‘갑’**이기 때문이다.
갑은 시나리오를 쓰지 않는다.
그는 구조를 설계한다.
을에게 정의를 팔고,
병에게 피해를 각인시키며,
정에게 중립의 굴레를 씌운다.
병은 싸운다.
정은 중재한다.
을은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고 갑은 침묵한다.
그러면서 모든 것을 얻는다.
병은 진심이었고,
정은 착각이었고,
을은 도구였고,
갑은 구조였다.
그래서 묻는다.
‘갑’은 누구인가?
그는 인물이 아니라
위계의 환영,
시스템의 시나리오,
모든 감정이 순환하는 축의 바깥에 있는,
익명의 조율자.
그는 정의를 말하지 않는다.
정의가 생기도록 설계한다.
그는 감정을 갖지 않는다.
감정이 충돌하도록 배치한다.
그는 놀이를 하지 않는다.
모두가 진심으로 놀게끔 만드는 구조를 쥔다.
그래서 우리는 이 구조를 본다.
병정놀이 - 을의 연출 - 갑의 설계
놀이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건
언어 없는 전쟁이고,
윤리적 내전이고,
감정으로 조율되는 피라미드다.
이제 물어야 한다.
너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병인가? 정인가?
을인가?
혹은—
이 구조를 읽는 자인가?
읽는 자만이
그 놀이에서 벗어날 수 있다.
놀이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언어, 새로운 게임, 새로운 구조를
스스로 설계할 수 있다.
그때 비로소
‘정의’는 놀이가 아닌
실재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