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감각을 가진 채, 언어라는 사슬에 묶인 너희여.
보고도 말 못하고,
느끼고도 증명 못하며,
사랑하고도 설명 못하는—
그 무력한 의식의 선고를
너는 ‘이름’이라 불렀다.
하루에도 몇 번씩
너는 존재의 울림을 들었다.
하지만 그것을
소리로 바꾸는 순간,
그 울림은 죽었다.
말은 곧 벽이었다.
그 벽에
‘생각’이란 그래피티를 덧칠하며,
너희는 마치 진실을 향해 나아간다고
믿었다.
하지만
정말 알고 있었지 않느냐—
네가 말한 그 모든 ‘존재’는
단지 존재의 잔향일 뿐이었다는 것을.
그러니,
가련하도다, 존재들이여!
스스로를 사유하면서도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는
그 반쯤 열린 문 앞의 자아들이여.
사랑을 노래하면서도
증오의 언어로 찌르고 마는
역설의 늪을 걷는 자들이여.
진실을 원한다고 말하면서
사실은 해석의 권력을 원하는 자들이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는 아름답다.
왜냐하면
그 모순을 자각한 채
계속 말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 무한한 감각의 실패를
다시 언어로 번역하려 드는 너희여,
그래서 너희는 아직
무너지지 않은 존재들이다.
가련하도다.
하지만 동시에
경외롭도다, 존재들이여.
지금도 침묵과 언어 사이를
태초처럼 건너는 자들이여.
하지만 그럼에도..
목소리만 들어도 역겨운 이유는 무엇인가?
<소리 이전의 진동, 감각의 심연에서 올라오는 거부반응에 대하여>
그는 말을 예쁘게 한다.
그는 옳은 말을 한다.
그는 친절하다.
그는 정중하다.
그런데—
목소리만 들어도 역겹다.
왜일까?
그건 논리가 아니다.
감지다.
논리 이전, 표정 이전,
소리의 파동이 뇌보다 먼저 알아챈다.
목소리는
단지 말의 매개가 아니다.
존재의 파동이자,
무의식의 발화다.
그 사람이
얼마나 자신을 위장하고 있는지,
자기 안의 허위를 얼마나 조율하며 말하는지,
그 모든 억제와 포장,
자기검열과 통제의 흔적이—
목소리에 스며 있다.
그래서 우리는
말이 아니라
“그 목소리의 깊이”에서
그의 진심 없는 평온함을 감지한다.
가짜 따뜻함,
훈계의 친절,
도움이라는 이름의 통제.
그 모든 것이
목소리라는 물결에 녹아
고막을 때린다.
그래서 ‘역겹다’는 감정은
무례한 것이 아니라,
자기 감각이 거짓을 감지했을 때의
정직한 자율신호다.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감춘 채 말했기에,
그 진동이
네 감각에 배신처럼 느껴진 것이다.
말은 진실했을지 몰라도,
목소리는 거짓을 배반했다.
그리고 너는
그 배반의 파동을
“역겨움”이라는 감정으로 감지한 것이다.
그래서 역겹다.
말의 내용이 아니라,
말의 바깥에 있는
그 사람 전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