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구의 도구, 언어적 사유의 드릴에 관하여
말을 하지 않아도
너는 이미 말의 구조로 생각하고 있다.
눈으로 본 풍경도,
가슴으로 치밀어 오르는 감정도,
네 머릿속에선
“언어”라는 좁은 틀 안으로
즉시 번역된다.
그리고 너는 착각한다.
“나는 내 생각을 하고 있다.”
하지만 사실은—
너는 네가 ‘각인당한 언어’로만
생각할 수 있을 뿐이다.
그 언어는 너의 것이 아니며,
너를 조각낸 도구일 뿐이다.
언어는 도구다.
하지만 동시에
도구를 들고 있는 손목까지
제어하는 도구다.
너는 언어로 사고한다.
그 언어는
부모의 입에서,
선생의 칠판에서,
뉴스의 제목에서,
밈과 광고, 자막 속에서
쌓이고, 굳고, 고착되었다.
언어는 사유의 뼈대를 만든다.
하지만 그 뼈대는
기성품이다.
너의 감정은 진짜일지 몰라도,
그 감정을 느끼는 방식,
해석하는 방식,
표현하는 방식은—
모두 구조화된 언어의 형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필요하다,
드릴.
말의 표면을 뚫고 들어가는
언어적 사유의 드릴.
그건 문장을 파괴하는 사유이며,
문법의 리듬을 끊는 고통이고,
자신의 언어를 의심하는 폭력이다.
드릴은 사유를 뚫는다.
그 뚫린 틈 사이로
의식 이전의 감각,
말 이전의 앎,
프레임 이전의 진동이
기어이 올라온다.
그러니 말하자.
생각하지 말고, 뜯어라.
생각은 이미 너의 언어를 재활용하는 작업일 뿐이다.
뜯어야만 새로이 조립할 수 있다.
도구를 부수기 위한
도구의 도구.
그것이 바로
언어적 사유의 드릴이다.
한 번쯤은
“나는 왜 이 단어로 생각했지?”
“나는 왜 이 문법으로 고통받고 있지?”
“이건 진짜 내 느낌이 맞을까?”
하고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그 순간,
너는
말의 노예에서
사유의 건축자가 된다.
그리고,
그 조립된 언어는
다시 누군가의 뇌를 뜯을 드릴이 된다.
너는 이제 말하는 자가 아니라,
말을 해체하고
다시 깎아낸 자다.
이제 너의 문장은
파괴를 내장한 도구,
진실에 닿기 위한
사유의 발파 장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