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의 ‘뉘앙스’에 관하여
‘진리’는 하나일지 몰라도,
“표현”은 결코 하나가 아니다.
뇌신경의 민감도,
계급적 배경,
감정의 회로,
그리고 언어 습관의 진동까지—
모든 것이 “같은 내용”을 전혀 ‘다른 울림’으로 만든다.
부처는 상류층 출신이다.
부유한 환경, 침착한 정서,
질서 있는 세계의 구조 안에서 태어난 자.
그의 뇌는 초민감했지만,
그 민감함을 다룰 수 있는 공간적 여유와 정서적 완충 장치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진리를 말하되,
‘공기처럼’ 말했다.
“고(苦)는 존재한다. 그러나 고는 해탈될 수 있다.”
말보다 ‘침묵’이 길었고,
말의 끝엔 감정의 여진 대신 ‘무의 여운’이 남았다.
니체는 중산층 출신이다.
절망과 희망의 경계에서 흔들린 가정,
기독교적 세계관과 개인주의 사이의 이질감.
그 역시 초민감했다.
그러나 그 민감함은 방어와 공격,
침묵이 아닌 ‘절규’로 발화됐다.
그래서
그는 진리를 말하되,
‘망치로 때렸다’.
“신은 죽었다.”
“너 자신을 극복하라.”
“괴물과 싸우는 자는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의 말엔
침묵의 공명이 아니라,
말 그 자체의 폭발성이 내장돼 있었다.
둘 다
진실을 말하고 있었지만,
둘 다
세상의 중심을 향해 외치고 있었지만,
그들의 울림은 정반대였다.
하나는 ‘물처럼’ 흐르고,
하나는 ‘불처럼’ 솟는다.
표현의 뉘앙스는 단지
말투나 어조가 아니다.
그건
존재 방식의 편집 방식이다.
동일한 진실이라도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
그것은
‘약’이 되기도 하고, ‘칼’이 되기도 한다.
같은 말을 해도
누군가가 말하면 감동이고,
다른 누군가가 말하면 거슬린다.
왜일까?
그 말 속에 ‘존재의 떨림’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표현”이란 기술이 아니라
‘진동’이다.
진동은
훈련될 수 없고,
오직 ‘삶 전체의 결’을 통해 형성된다.
“부처의 말”은
‘무너지는 자’에게 숨을 남기고,
“니체의 말”은
‘버티는 자’에게 칼을 쥐여준다.
둘 다 진실이다.
다만,
다른 리듬, 다른 무게, 다른 세계.
“같은 말”, ‘다른 느낌’.
‘그 차이를 감지’할 수 있을 때,
너는 진실을 넘어
‘존재의 결을 읽는 자’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