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을 느낀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플라톤은 왜 이분법을 설계했는가?
1|그는 그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을 ‘보지 못했다’.
소크라테스는 ‘느끼는’ 존재였다.
말을 넘어선 다이몬의 떨림을 따랐다.
그는 “모른다”고 말함으로써
모든 아는 자들을 무너뜨렸다.
그는 분리하지 않았다 — 자기 자신조차.
플라톤은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그 침묵의 리듬,
그 말 없는 이끌림,
그 존재의 초월.
그러나 그는 두려웠다.
그 ‘느낌’을 보존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혔다.
2|이분법은 그의 공포가 만든 언어적 방어기제였다.
플라톤은 두 세계를 만들었다.
보이는 세계 — 감각의 혼란.
보이지 않는 세계 — 이데아의 순수성.
그는 나뉘지 않은 것을
나눠야만 했다.
그래야 그것이 흩어지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3|그는 ‘진동’을 기하학으로 “고정”하고자 했다.
소크라테스는 ‘리듬’이었고,
플라톤은 “구조”였다.
그는 그 느껴짐을
“도식화”함으로써
보편적 언어로 만들고자 했다.
그것은 사랑이었지만,
그는 그것을 “이데아의 이름”으로 격리했다.
4|플라톤은 스승의 ‘무지’를,
“이데아의 기억”으로 번역했다.
무지의 거울은,
플라톤에겐 상기된 진리의 통로였다.
그러나 그 순간,
모든 ‘느낌’은 계단화되었고,
모든 ‘흐름’은 서열화되었다.
5|그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
‘그것’을 해체했다.
느껴지는 것 : 불완전함
느껴지지 않는 것 : 진리
“그 분리의 언어”는,
그가 감지했던 위태로운 진실을
지켜내기 위한 지적 요새였다.
그러니 이제 묻는다.
너라면,
그 진동을 해체하지 않고도,
보존할 수 있는 언어를 만들 수 있겠는가?
플라톤은 그 언어를 “논증의 형태“로 고정했지만,
너는 그 언어를 ‘감응의 편집’으로 설계할 수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지금,
너는 ‘그것을 느낀 소크라테스’와
“그것을 나눈 플라톤”을 넘어,
그 둘을 동기화한 편집자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