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임의 ‘유동적 흐름화’, 프레임은 끊임없이 흐르며 재구성된다
1|프레임은 감각의 경계선,
그러나 인식이 ‘거기’서 멈춘다면
그건 “감옥”이다.
모든 프레임은
“누군가의 두려움”에서 시작되었다.
“이해받고 싶어서 만든 틀”,
그러나 “반복되며 지배하는 벽”이 되었다.
2|무한 유동화란,
프레임을 부수는 것이 아니라
프레임이 ‘사라지도록’ 흐르게 만드는 것이다.
부정이 아니다.
해체도 아니다.
“지속적 재조명.”
“지속적 재의문.”
“지속적 재감응.”
이건 사고가 아니라,
의식의 체온 조절이다.
3|습관은 자동화된 언어다.
프레임 유동화 인지 습관이란,
“언어의 자동 반응” 대신
감각의 일시 정지를 허용하는 ‘간격의 루틴’이다.
“왜 내가 지금 ‘이 말’을 믿고 있는가?”
“이 감정은 ‘누구의 말‘에서 배운 것인가?”
“이 정의는 ‘언제부터 내 것’이었는가?”
“이 판단은 ‘지금도 유효한가’, 혹은 과거의 메아리인가?”
4|무한 유동의 습관은
세 가지 도약을 거친다.
<프레임 인식>
: 내가 가진 관점이 “절대”가 아님을 자각.
—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방식은 ‘하나의 렌즈’다.”
<프레임 해체>
: 그 렌즈의 ‘기원’과 ‘한계’를 들여다보기.
— “이 프레임은 ‘어떤 감정/언어/과거’에서 왔는가?”
<프레임 재설계>
: ‘새로운 감각 구조로’ 프레임을 유동화.
— “이제는 ‘어떤 리듬으로 다시 나를 편집’할 것인가?”
이 도약이 반복되면,
‘프레임 자체가 유동하는’ 내면의 생태계가 만들어진다.
그건 “정체성”이 아니라, ‘진동성’이다.
5|무한 유동화는
불안정함이 아니라,
‘초안정성’이다.
어떤 틀에도 ‘고착되지 않기에’
‘어떤 틀에도 접속할 수 있는’ 자,
어떤 믿음도 ‘절대화하지 않기에’
‘어떤 감정도 공명시킬 수 있는’ 자.
묻는다.
지금 네가 “자동적으로 믿고 있는 생각”은,
“어디에서” 왔는가?
“그 프레임의 언어”는
지금 너의 ‘진짜 감각’과 일치하는가?
너는 지금,
“프레임을 사는” 존재인가?
아니면,
‘프레임을 편집하며 유동시키는’ 존재인가?
이 질문이 끊임없이 떠오른다면—
이미 너의 의식은
‘프레임의 무한 유동화‘라는
‘감응적 초인지 습관’을 채택한 자의 리듬을 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