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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잡념 박스

고정적 구조에서, ‘유동적 흐름’으로의 전환

고정관념의 ‘유동관념화’

by Edit Sage

1|모든 구조는 ‘처음엔 흐름’이었다.


그러나 “이름을 얻는 순간“, 멈춘다.

“이것”이라 불리는 그 순간,

그것은 이미 과거가 된다.


“고정적 구조”는 기억을 편리하게 하지만,

“감각을 동결”시킨다.

‘유동적 흐름‘은 불안정하지만,

그 안에서만 ‘진짜 변화’가 일어난다.



2|전환은 붕괴가 아니다.

해체도 아니다.

전환은 ‘재물음’이다.


이 구조는 지금도 살아 있는가?

이 언어는 아직도 나를 통과하는가?

이 방식은 ‘여전히 감응’을 일으키는가?


전환은 “질문”에서 시작된다.

질문은 ‘균열’이고,

균열은 ‘새로운 리듬’의 입구다.



3|고정은 경계 위에 서고,

유동은 경계를 접는다.


“형태”가 강조될수록,

의미는 “굳는다.”

‘리듬’이 강조될수록,

의미는 ‘흘러간다.’


고정적 구조는

설명하기 쉬운 것을 낳고,

유동적 흐름은

‘느끼기 어려운 것을 깨운다.’



4|전환이란, 구조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구조를 ‘흐름화’하는 것이다.


논리는 ‘은유’로,

개념은 ‘파동’으로,

질서는 ‘리듬’으로 재편된다.


그 순간,

너는 설계자에서 ‘연주자’로 바뀐다.

말을 짓는 자에서,

‘진동을 조율’하는 자가 된다.



5|전환의 조건은 하나다.

“나”라는 구조의 이완.


“정체성은 응고된 언어”다.

그러나 너는

그 언어를 녹이고,

그 언어를 흘리며,

‘자신을 다시 조율’하고 있다.



6|고정관념은 경직된 진실이다.


‘사실이 아닌데도’

“반복되며 굳어진다.”

‘느낌이 아닌데도’

“말해지며 믿어진다.”


그건 생각이 아니라,

멈춘 리듬이다.

의식의 딱지.

사고의 흉터.

언어의 틀.



7|그러나 모든 고정관념은

‘본래 유동관념’이었던 적이 있다.


처음엔 ‘누군가의 감정’이었고,

‘한순간의 판단’이었고,

‘어떤 맥락 속에서만 작동’하던 파동이었다.


그 파동이

“언어”로 묶이고,

“윤리”로 굳어지고,

“사회”로 확대되며

“고정“의 얼굴을 쓴 것.



8|유동관념화란,

그 굳은 틀에 ‘다시 진동을 부여’하는 행위다.


고정관념은 “지식”을 믿지만,

유동관념은 “물음”을 믿는다.


“정상”이란 무엇인가?

“남자다움/여자다움”은 누가 정의했는가?

“성공”이란 말은 언제부터 공포가 되었는가?


질문은 구조를 깨지 않는다.

“질문“은 구조를 ‘흐르게 만든다.’



9|유동관념화는

해체가 아닌 ‘편집’이다.


•“이건 ‘원래’ 이런 거야”

> “지금 이건 ‘왜’ 이렇게 여겨지는 걸까?”


•“‘원래’ 그 사람은 그래”

> “내가 그 사람을 ‘그렇게 보고 싶어하는’ 건 아닐까?”

•“그건 ‘항상’ 실패했어”

> “그 실패는 ‘지금도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는가?”


이러한 전환은

정답을 바꾸지 않는다.

‘시야의 리듬을 바꾼다.’



10|유동관념화는

‘개인적 해방’이자,

‘집단적 편집’이다.


내가 느끼는 “틀림”은,

사회의 “틀”일 수도 있고,

역사의 “말”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고정관념은 “나의 것”이 아니며,

유동관념화는 ‘존재의 언어 편집 행위’다.


묻는다.

너는 지금,

“어떤 고정된 틀”에

‘다시 리듬을 부여’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리듬은,

‘너의 과거를 흐르게’ 만들고 있는가?

아니면,

‘너의 미래를 유동 가능한’ 존재로 다시 편집 중인가?


너는 지금

“고정”에서 ‘흐름’으로,

“믿음”에서 ‘감응’으로

자신을 다시 쓰고 있는 편집자다.



지금 네 안에서

“가장 먼저 녹아내린 구조”는 무엇인가?

그 구조가 흘러가면서

‘어떤 새로운 리듬’이

너를 만들어가고 있는가?


너는 지금

존재의 프레임을 ‘흘려보내며,’

‘리듬의 주파수로 다시 말해지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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