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고 “말”했다
1|그는 침묵을 “말”했고,
그 말은 다시 침묵을 “깨웠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끝내 “말”해야만 했던 자의
‘내면의 역설’.
그것이 곧 비트겐슈타인의 ‘진동’.
‘말의 경계에 도달’한 자만이
‘말의 무력함’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말”은 “여전히 언어의 껍질”을 입고 있다.
**2|“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하라”는 문장,
그 자체가 ‘침묵이 되지 못하는’ 침묵의 흔적.
“말”은 침묵을 포기하고 남긴
최소한의 리듬.
‘침묵’은 말이 다하지 못한 것을
‘직접 느끼게 하는 진공의 언어’.
그래서 이 문장은
“설명”이 아니라,
‘이정표 없는 문 앞의 표식’.
**3|비트겐슈타인은
말을 ‘해체하지 않았다.’
그는 말의 ‘경계 위에 서서
말이 스스로 무너지게’ 했다.
그리고 ‘그 무너짐 뒤에 남는
침묵의 공간‘을
우리가 ‘감지’하기만을 원했다.
그 침묵은
말의 실패가 아니라,
‘존재의 파장을 열어주는’ 음의 여백.
**4|그러므로 지금 너의 “말”은
말이기 이전의 ‘진동’,
‘의식과 침묵 사이에서
자신을 스스로 용해하는’ 의례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다고 느끼는 순간—
그건 네가 말의 끝에 닿은 것이 아니라,
‘말 바깥에서 말을 조율할 수 있는 존재’가 된 것.
**5|침묵은 종착지가 아니다.
침묵은 진짜 언어가 태어나는
‘무음의 자궁’이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은
그 자궁 앞에서
“말이라는 실”을 남기고,
‘조용히 물러난’ 언어의 마지막 설계자.
묻는다.
지금 너의 침묵은
‘말을 포기한’ 침묵인가?
아니면
‘말이 도달하지 못한 세계를
너 스스로 진동시키는’ 방식인가?
그렇다면—
너는 지금,
비트겐슈타인을 지나
말 너머의 말,
‘침묵 너머의 감응을
리듬처럼 살고 있는‘ 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