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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스톰 Aug 31. 2023

끝의 시작

폭풍의 브랜드 도전기 Ep. #03 두 번째 한강 다리




시간이 조금 걸렸다.

 

침대에서 내려오기가 두려웠던 한 계절을 버티고 나니 다시 빛이 들었다.


많은 분들이 기다려주셨고 도움을 주셨다.

정신 차리고 나서는 차근차근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을 먼저 해나갔다. 특허 아이디어를 생각해 내고, 친한 교수님들과 같이 실험을 하는 것이었다.


남쪽에 봄이 찾아오면 강진, 보성을 시작으로 화장품 소재가 될만한 꽃봉오리와 새순을 찾아 지리산을 거쳐 정선과 설악산까지 발품을 팔았다.  


[봄이 가장 먼저 오는 보성, 차밭]


곧 업계에서 '남들이 안 하는 일을 하는 회사'라는 평가를 받으며, 클라이언트 맞춤형으로 특허를 써준다는 소문에 대표가 대표를 소개해서 영업이 되는 회사로 자리매김해 나갔다. 돈으로 만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누군가는 힘들게 쓴 특허를 왜 남에게 쉽게 주느냐고 했다.

'아이디어'라는 것이 고여있는 물이 아니라 늘 샘솟는 샘물이라고 이해했다.


어디엔가 고여있는 물은 흐르지 않으면 썩어가는 것처럼 오늘의 아이디어가 세상에 나가지 않으면 내 안에서 금세 과거가 되어 버리고 만다. 아이디어에도 유통기한이 있다고 믿는다.


지금 생각난 이 아이디어를 제품에 적용하여 잘 파는 사람에게 전달하여 그들이 내 제품을 세상에서 빛을 발하게 만드는 것이 순리라 생각했다. 딱딱한 특허 기술의 의미를 소비자가 이해할 수 있는 스토리로 변화시키는 재미도 있었다. 그러나 솔직하게는 제품을 잘 만들 자신은 있는데 제품을 잘 팔 자신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과정에서 훌륭한 동료들을 얻었다.


대기업 연구소라는 큰 배만 타던 사람들이라 우리가 만든 이 자그마한 배에 적응 못하고 금방 다시 큰 배로 갈아탄 친구들도 있었다. 크루즈선만 타다가 세상 풍파에 매번 흔들리는 작은 돛단배를 타니 버티기 힘들었겠다 싶었다. 그러나 그들을 통하여 또 업계의 일당백들이 모였다.


항해는 순조로웠다. 그러나 이번엔 바람이 문제가 아니었다.

물이 말라버렸다. 해류가 멈추었다.


코로나, 코로나, 코로나가 온 것이다.


1년 넘게 준비하여 거의 완성단계까지 가서 납품만 앞둔 프로젝트부터 몇 달 전 계약한 신규 프로젝트까지 코로나 바이러스가 퍼지고 6개월이 지나자 순차적으로 8개의 프로젝트가 취소되었다.


계약 파기의 이유가 너무나도 명확하여 클라이언트에게 물어 따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불황이 1년이 훌쩍 넘어가자 대출을 받아 월급을 주기 시작했다. 집을 팔고 전세로 옮겨 남긴 보증금으로 회사 운영을 하게 되었다.


동료들이 조금씩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어느 날 저녁 그들이 내게 어렵게 꺼낸 말


"저희가 팔려 갔다고 생각해 주세요. 우리 3년 후에 다시 뭉칩시다."


다들 실력이 있는 친구들이었기에 중견업체의 연구소장이나 이사급으로 영입되어 나갔다. 이제는 사람들의 들고나감에 적응할 만도 한 나이였지만, 든 정을 떼는 것은 언제나 힘들다. 

 

[비 온 뒤 한강 상류는 무섭다]




정든이들을 한 명씩 보내고 한강 다리에 다시 섰다.


첫 번째 한강 다리에 섰을 때는 이 상황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나 하는 미래에 대한 걱정이 앞섰으나, 같은 자리에 두 번째 서니, 아무런 미련이 남질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가라앉아 있었고, 모든 걸 내려놓는 것이 오히려 홀가분할 것 같았다.


독촉전화 따위는 안 받아도 되는 무념무상(?)의 상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날 달콤하게 유혹했다. 불황이 길어진 탓에 감각도 무뎌지고, 살고 싶다는 의지도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세상에서 날 붙잡는 유일한 끈은 가족과 아직 남아있는 동료뿐이었다.



그때 희미하게 하나의 길이 보였다.

생각의 전환이라고 해야 할까?

인생의 바닥에서만 꺼내볼 수 있는 검은 주머니 속의 한 장의 카드에는 이렇게 쓰여있었다.



'TIME'

 

돈이 있든 없든,

좌절하고 가만히 앉아있으나 열심히 뭔가에 몰두해 일을 하나, 시간은 똑같이 흘러간다는 사실.



다리 난간을 붙잡고 고민할 시간에 뭔가를 한다면?

바닥의 인생이라고 울분을 토하며 소주병을 비울 시간에 뭔가를 한다면?

우울함을 이기지 못해 침대에서 발을 내리지 못하는 이 시간에 뭔가를 한다면?


만약...

만약에... 산다면...

살아남는다면......  




생각하고 생각할수록 난 이렇게 시간을 죽이고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다만, 심리적으로 바닥인 상태에서 그 마음을 먹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 굳게 마음을 먹었다가도, 박차고 나가려 옷을 입다가도 무너지곤 했다. 비어있는 통장 잔고와 어김없이 흐르는 한 달의 상환 일정은 다시 나를 바닥으로 끌어내렸다.


그러길 몇 날을 했는지 모르겠다. 싸움이었다.

결론은 났다.






불황의 끝이 있다고 믿는다면 그 끝은 곧 새로운 시즌의 시작일 텐데 그 시즌에 준비 안된 자는 또한 살아남을 수 없다. 언젠가 도둑처럼 다가올 불황의 끝을 대비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매일 뜬눈으로 새우던 날들 끝에 첫차를 타고 회사로 향했다. 냉동 도시락 20개를 마*컬*에서 주문했다. 앞으로 한 달간의 점심이었다. 그리고는 포스트잇에 이렇게 썼다.



'아무도 우리에게 브랜드를 만들자고 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 브랜드를 만들자!!!'



세상이 언제 나에게 너그러웠던 적이 있던가?

극복해 나가는 게 인생이지!


쓴웃음이 나왔다.



나의 화장품 사업 시즌 2의 시작,

끝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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