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평온한가 싶었던 지영의 마음은 다시 한번 더 뒤집어졌다.
또 일적으로 컨펌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왔고,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지영을 잡도리했다.
이번에는 꽤 대담한 그녀였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아뿔싸. 지영은 모두가 보는 앞이라서 잠시 방심을 했고, 미처 이 상황을 녹음하지 못했다.
다만, 카톡으로 황당함을 표하며 좋은 생각만 하라는 연락이 왔을 뿐이다.
지영은 그녀의 자기중심적이고, 어이없는 행태에 더이상 놀랍지는 않았다. 좀 황당하고 유치하다는 느낌정도.
그렇지만 옆자리의 민주씨와 대놓고 차별대우를 할 때에는 기분이 더러웠다.
가장 크게 차이가 나는 상황은 업무에 대한 피드백이었고, 동시에 제일 기분이 더러운 상황이기도 했다.
민주씨가 공문 기안에서 틀린 부분이 있거나 작은 실수를 한 경우에는 쪼르르 민주씨의 자리로 가서 조용히 틀린 부분을 알려주며, 이러저러하게 고치라는 전달을 하고는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
이에 반해, 지영의 업무에 대해서는 그냥 넘어가도 될 만한 사안에 대해 마치 큰 실수라도 한 것처럼, 무능력한 사람 취급을 하기 위해 혈안이 된 듯한 반응을 보였다.
처음에는 주로 모욕감을 느끼며 불쾌했던 감정들이 어느 덧, 황당함으로 변화하고 있는 지영이었다.
사적인 대화에 대해서는 전혀 기대하는 바도 없었을 뿐더러, 대화가 없는 편이 지영에게는 한결 편했다. 처음에 그녀가 이 곳에 와서 나름 사적인 대화를 나누었던 그때를 떠올려 보아도, 그닥 말이 안통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 대화를 나누고 있지 않는 이 불편한 상황을 개선하고 싶어할 것 같았다.
그랬다. 대화는 대화가 되는 사람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녀와는 이전에도 대화가 잘 되지 않았다. 지금의 이 불편함이 크게 느껴지는가 싶다가도, 이전에도 불편했었음을 떠올렸다.
그녀는 셋이 있는 단톡방에서 민주씨에게 반말을 하며 친한척을 했다. 그런 그녀에게 충성을 다하는 민주씨였다.
소외감? 글쎄, 그 보다는 지영은 민주씨가 좀 불쌍해보였다. 그녀에게 충성을 다할수록 그녀의 요구가 많아질 것을 지영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굳이 그녀의 입안의 혀 처럼 굴며, 그녀에게 이용당하고 싶지 않은 지영이었다.
다음번에 또다시 업무적으로 피드백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런 상황에서 가만히 대꾸하지 않고 있는 것이 최선이었을까?
교수님, 지금 감정 조절이 잘 안되시는 것 같은데,
카톡이나 메일로 전달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땠을까? 다음번에는 이렇게 말해볼까?
학부, 석사, 박사를 서울대학교에서 하고선 집도 절도 없으신 분이
나이는 40대를 넘기고, 1시간 거리에 출근을 해서
이런 곳에서 짬처리를 하고 있으니, 불쌍하게 넘겼습니다만,
그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선을 지켜주시죠?
이렇게 말했어야 했을까?
"야!!!!!!!!! 니 뭐 되???????? 니가 내 월급 줘???????????
똑같이 1년 짜리 계약직인 주제에 되게 잘난줄 아네.
이렇게 말했어야 했을까???????
지영은 자신에게 피해가 되지 않으면서 그녀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말에는 무엇이 있을까 한참을 고심해본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지.
지영은 그녀를 만나고 나서, 많은 내적 탐색과 성장을 한 듯한 기분이 든다.
먼저, 서울대학교에 대한 환상이 무너졌다. 그것은 어쩌면 길게 보았을때 아들을 기르는데 아주 중요한 경험이 되었을지 모른다. 공부 좀 한다고 오냐오냐 키우지 않겠다는 다짐, 서울대학교만 가면 인생이 탄탄대로 일지 모른다는 고정관념을 과감히 던져버릴 수 있었다. 학교나 성적보다는 아들에게 좀 더 집중하겠다는 다짐을 하게되었다.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친절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영은 자신의 본능에 가까울 정도로 처음 보는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를 만나고 나서, 앞으로는 새로운 사람을 알아가는 과정을 길게 가질 필요가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최근에 새롭게 가입한 조합의 첫 행사장에서 효과가 있었다.
지영은 자신이 회색돌처럼 누군가를 대한다는 것이 처음에는 불가능할 것처럼 여겨졌다. 그래 본 적도 없었고, 그러면 안될 것 같아서. 그러나 그것이 필요할 때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새로운 하나의 페르소나가 만들어진 것이다.
무엇보다, 지영은 이제서야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자신과 타인의 감정을 분리하고, 타인의 문제를 자신에게로 끌어들이지 않는 것. 스스로를 믿어주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향해 포기하지 않고 가는 것.
이 모든 것들이 그녀를 만나고 난 이후에 깨닫게 된 것들이다. 그리고 문득 지영은 과거에 자신이 '대체 가스라이팅을 당한다는게 무슨 느낌일까?'궁금해 했던 것을 떠올렸다. 얼마나 심리적으로 유약한 상태면 가스라이팅을 당하지? 가스라이팅을 한다는 것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가스라이팅을 당한다는 것 또한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지영은 문득, 그런 것들을 궁금해 했기 때문에 자신에게 이런 일련의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착각조차 일었다. 앞으로는 함부로 무엇인가를 궁금해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도 함께.
아무쪼록 아무리 힘든 상황 속에서도 잘 극복해 내는 사람들에게는 네 가지 특징이 있었다고 한다.
방법이 있을거야. 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욕구를 잘 이해하고, 그 욕구를 잘 발휘할 수 있도록 방법을 찾는다.
지금은 힘들어도 긍정적인 의미가 있을거야. 지금의 상황을 긍정적으로 재평가 하는 것.
지금은 힘들어도 이것만 끝나면! 이라며 긍정적으로 재초점하는 것.
이만하길 다행이다. 라고 관점을 전환하는 것.
즉, 불편한 정서를 편안한 정서로 바꾸는 전략적 감정조절능력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 결국은 긍정이 한 수 위다.
큰 바람이 불었고 세계는 그대로가 아니냐.
네 안에서 부는 바람에 너는 너무 오래 흔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