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의 비밀

결혼이라는 선택이 시작된 아주 사소한 순간

by 서쪽 침실

그날 장례식장에서 퍼즐이 맞춰지던 순간,
15년 전의 장면들이 조용히 떠올랐다.

큰언니가 결혼을 한단다.
둘째 언니가 결혼한 지 정확히 일곱 해 뒤였다.

어릴 때 나는 큰언니와 전혀 친하지 않았다.
공감대도 없었고, 가까워질 기회도 없었다.
언니는 늘 나와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다.
학벌도, 외모도, 직장도 언제나 앞서 있던 사람.

그런 언니가 결혼만큼은
연년생인 둘째 언니에게 처음으로 뒤처진 순간이었다.

그 무렵 큰언니는
고강도의 다이어트를 하며 다른 사람처럼 변했고,
한동안 미친 듯이 옷을 사들였다.

사이즈가 같아지자
우리는 처음으로 같은 가게에서 옷을 고르고,
같이 여행을 다녔다.

멀게만 느껴졌던 언니와의 거리가
그때부터 조금씩 좁혀졌다.

언니는 결혼 생각이 없었다.
나도 그랬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라고 믿었던 큰언니가
갑자기 결혼을 한다고 했다.

처음엔 언니의 부재가 잘 와닿지 않았다.
엄마, 아빠, 나.
집 안 풍경이 단순해졌다는 느낌뿐이었다.

그러다,
내가 결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순간이 왔다.

언니가 결혼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았던 어느 날,
언제나처럼 언니의 생리대 서랍을 열었는데
그곳이 텅 비어 있었다.

순간,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아.
나도, 결혼해야겠구나.

언니가 떠난 자리가 실감 나는 그 순간,
나의 마음도 함께 움직였다.

그즈음이었다.
새로 이직한 회사에서
갑자기 한 팀원이 메신저를 보내왔다.

“대리님, 소개팅할래요?”

얼굴도 모르는 타 팀 팀장님의 제안이었다.

자만추를 신봉하던 나는
소개팅이라고는 딱 한 번,
친구 남편의 친구였던 사람을 만난 적밖에 없었다.

귀엽게 생긴 얼굴과 달리
내내 자신의 자가·외제차 대서사만 늘어놓던 남자.
그날 이후 ‘다시는 소개팅 안 한다’고 다짐했었다.

그런 내가,
언니가 떠난 뒤 마음 둘 곳이 없어지자
귀신에 홀린 듯 연락처를 넘겨주었다.

며칠 뒤 소개팅남이 연락을 해왔다.
말투도 정중했고, 목소리도 괜찮았다.
얼굴은 못 봤지만,
프로필 정보에서 이미 호감이 생겼던 터라
그다지 망설이지 않았다.

소개팅 당일.
오후 약속임에도 오전부터 공들여 준비를 했다.

종로3가역.
각자의 집 기준으로 딱 중간 지점이었다.

출구가 너무 많아 헤매다가
5분 늦는다고 전화로 양해를 구했다.

그리고 출구를 나오자
남자 몇 명이 서 있었다.

그중 한 사람에게서
유독 낯선 긴장감이 풍겨왔다.

나는 그의 등을 살짝 터치했다.

천천히 돌아보며
양쪽 귀에 꽂힌 유선이어폰을 내리던 얼굴.

하얗고 선한 눈매에
통통한 볼살과는 다르게
갸름하게 떨어지는 턱선.

좋았다.
솔직한 첫인상이었다.

그런데 내려오는 시선 아래로
강렬한 컬러의 가디건,
구겨진 면바지와 운동화,
어딘가 ‘소개팅’과는 거리가 먼 옷차림이 보였다.

나도 모르게 물었다.
“어디.. 다녀오셨어요?”

여의도에서 수업을 듣고 왔다고 했다.

그 순간 나는
‘아, 이 사람에게 소개팅은 오늘의 우선순위가 아니었구나.’
그렇게 느껴졌다.

기분이 조금 상했다.

그리고 걸어가던 중,
MC 스나이퍼 기질이 발동해 버렸다.

“그래도 소개팅인데...
옷을 그렇게 입고 나온 거예요?”

나는 그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그는 그냥 웃었다.

그 웃음이 진짜인지,
당황을 감춘 건지
나는 알지 못했다.

식사 자리에서 그는 말이 많았다.
집안 이야기, 학창 시절, 비밀스러운 이야기까지
너무 빨리 마음을 내어주는 사람이었다.

식사 후엔 갑자기 지구본을 사러 가자고 했고,
우리는 청계천을 걷다
영풍문고에서 지구본 하나를 샀다.

어색하지 않은 사람이었지만,
계속 그의 가디건이 눈에 거슬렸다.

그날 우리의 소개팅은
그렇게 끝났다.

그리고 아무 연락이 없었다.
나도 바쁘고 지쳐 있었기에
아쉽지도, 특별히 생각나지도 않았다.

그러다 정확히 5일 뒤,
그에게서 문자가 왔다.

영화가 재밌다며
같이 보지 않겠냐고.

그날 다시 만난 그는
처음과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머리는 말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옷은 편안하고 조용한 톤온톤.

내가 입은 옷과 묘하게 닮아
커플룩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낮에 보니 피부는 상당히 좋은 편이었고,
가디건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어깨가
넓고 반듯했다.

무심했던 면바지 대신 슬랙스를 입으니
다리도 길어 보였다.

나는 그만 마음이 기울어버렸다.

그날부터 우리는 사귀기 시작했다.
이 사람이 나의 전 남친이자,
지금의 남편이다.

나중에 알게 된 건,
그날 소개팅 후
내 말 한마디(옷 지적)에
그가 며칠이나 마음이 상해
에프터를 하지 않았다는 것.

왜 그런 옷을 입고 나갔냐고
주선자 형님에게도 한소리 듣는 바람에
더 연락이 꺼려졌다는 것.

그 가디건은
그가 가장 아끼는 옷이었고,
정성을 다해 고른
‘특별한 옷’이었다고 했다.

나의 말이 무례하게 느껴졌지만,
그럼에도 한 번 더 만나보고
마음을 정하고 싶어서
연락을 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그의 마음결이 조금 보였다.

잘 삐지고,
잠수 타고,
감정을 말로 풀어내지 못하고,
혼자 오래 머물러 있는 사람.

지금도 나는
그의 오래된 껍질을
조심스럽게 벗기는 중이다.

그 중심에는
어떤 씨앗이 자리 잡고 있을까.

그 비밀을 알고 싶다.
그리고 그 답은,
우리가 처음 싸웠던 날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