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이 말보다 먼저 부서진 밤
“이거 누구야?
수지야?”
남편과 세 번째 데이트 날이었다.
남편의 휴대폰 바탕화면에
뱅 헤어를 한 앳된 여자 얼굴이 보였다.
미쓰에이 수지였다.
수지 좋아하는구나?
요즘 수지 좋아하는 남자들 진짜 많더라.
우리 팀장님은 데뷔 무대 보자마자
쟤는 무조건 뜬다고 했다던데.
예쁘긴 진짜 예쁘네.
나는 가볍게 넘겼다.
남편이 여자 아이돌을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된 건 그 무렵이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학창 시절엔 SES 팬클럽이었다고 했다.
조퇴를 하고 팬사인회에 간 적도 있었다나.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모습이었다.
HOT와 젝키를 좋아하던 무리 속에서
김동률을 좋아하던 내 친구와
어딘가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에이핑크 노래도 다 꿰고 있는 걸 보면
혼자 있는 시간에
즐겨 듣는 것 같았다.
명절에 친정집에서
다 같이 음악방송을 볼 때도
형부들은 여자 아이돌이 연신 예쁘다고 말했지만
남편은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이건
나만 아는 비밀 아닌 비밀이 됐다.
그날은
주말에 볼 영화를 예매하던 중이었다.
“좌석, 여기랑 여기 중에 어디가 좋을까?”
나는 조심스럽게
남편의 휴대폰을 건네받았다.
좌석 배치도를 확대해 보던 중
화면 위로 메시지 하나가 스치듯 떠올랐다.
엥?
‘XX 공연 중 엉밑살’
무슨 말이지.
생각할 틈도 없이
손이 먼저 움직였다.
그냥, 동물적인 감각이었다.
창을 누르자
우르르 쏟아지듯
사진들이 떴다.
노출이 심한 여자들의 사진.
중간중간 보이는
익숙한 얼굴들.
일부러 찍은 사진이 아니라
어딘가에서 찍힌 사진들이었다.
이게 뭐지.
나는 그대로 휴대폰을 내밀었다.
“이게 뭐야?”
말이 튀어나왔다.
“이게 뭐냐고.
누가 보낸 거야?”
그동안 여자 아이돌 좋아한 것도
다 이런 거 때문이었어?
아니, 무슨 고등학생이야?
아직도 이런 걸 주고받아?
이럴 나이 지났잖아.
욕만 안 했지,
나는 이성을 잃고 있었다.
내가 알고 있던 남편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사실대로 말해.
하나도 빠뜨리지 말고.”
나는 마치
잘못을 추궁하는 보호자처럼
그를 내려다보며 말하고 있었다.
남자 형제 없이 자란 나는
그 순간의 남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회사 과장님이 보낸 거야.”
“뭐?”
“그 사람, 결혼 안 했어?”
“안 했어…”
말문이 막혔지만
곧 다시 말이 쏟아졌다.
당신이 결혼한 건 알지 않느냐고,
왜 다 큰 어른이 이런 걸 보내느냐고,
다들 일은 안 하고
단톡방 만들어서 이런 것만 공유하느냐고.
혼자 보는 건 누가 뭐라 하냐고,
이건 정말 못 넘기겠다고.
나는
내일 당장 회사에 찾아가겠다고 했다.
그 과장이라는 사람에게
직접 이야기하겠다고.
나도 처음 보는 내 모습이었다.
결혼해서
이런 일로 싸우게 될 줄은
단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다.
내 분노는
밖으로 터져 나왔고,
남편의 얼굴은 점점 붉어졌다.
나는 밖으로 터져버린 감정이었고,
남편은 안쪽으로 눌러 담은 감정이었다.
둘 다 상처는 드러났지만,
정작 단단한 씨앗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를
더 깊은 곳에서
곪게 하고 있었다.
몇 초의 정적 뒤,
남편이 말했다.
“알았어.
단톡방에서 나갈게.
그 사람도 차단할게.”
전의를 잃은 얼굴이었다.
그 말을 남기고
남편은 침실로 들어갔다.
다음 날 아침.
여느 때처럼
남편이 먼저 출근했고
나는 출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휴지통 위에서
반짝이는 무언가가 보였다.
액정이 산산이 부서진
남편의 휴대폰이었다.
망치 같은 둔탁한 물체로
내리찍은 흔적.
그는
자기가 가장 아끼던
신형 아이폰을
스스로 부숴버렸다.
충격이었다.
어제의 싸움이
이렇게 끝날 일이었을까.
그에게는
그만큼 수치스러웠던 걸까.
늘 순해 보이던
그 남자의 마음속에는
대체 무엇이 들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