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지 않은 시간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믿었던 것들

by 서쪽 침실

새로 이직한 회사는

공교롭게도 남편 회사와

도보로 5분 거리였다.


“자기야, 어떻게 이런 일이 있지?

이제 점심시간에도 만날 수 있겠네.

너무 좋다.”


말 그대로였다.

회사에 적응하느라 긴장해 있던 나에게

그 5분 거리는

이상하리만큼 든든했다.


어느 정도 새 회사에 익숙해졌을 무렵,

남편이 점심시간에 나를 불러냈다.


“같이 남산 갈까?”


눈부시게 맑은 가을날이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와

붉게 번진 단풍나무들.


회사 점심시간에

사랑하는 사람과 단풍을 본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팔짱을 끼고

남산 꼭대기까지 걸어 올라갔다.

산 정상에 라면을 파는 매점이 있다는 것도

그날 처음 알았다.


라면 기계에 물을 붓고 기다렸다.


“와, 진짜 신기하다.”


라면 자동 기계도

그때 처음 본 나였다.


“자기 라면 괜찮아?

배 금방 꺼질 텐데.”


“괜찮아.

맨날 샌드위치 먹는데 뭐.”


“샌드위치? 왜?”

“부서 사람들이랑 안 나가?”

“근처에 맛집 엄청 많던데?”


“어…”


그 짧은 망설임에서

나는 바로 알아차렸다.


아,

또 숨기는 게 있구나.


“뭔데?”

“왜 말을 하다 말아?”


잠시 머뭇거리던 남편이 말했다.


“사실…

나 점심시간에 영어학원 다녀.”


“어?”

“그래? 근데 왜 얘기 안 했어?”


“뭐…

굳이 말해야 하나 싶었지.”


“언제부터 다녔는데?”


“5월.”


지금은 10월이었다.


그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10분 뒤면

각자 회사로 돌아가야 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모두 삼켜야 했다.


“흠…

벌써 6개월이나 됐는데

나 그동안 몰랐던 거야?”


혼잣말처럼

낮게 내뱉었다.


그날 우리는

그 이후로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라면을 다 먹고

남산을 내려오는 발걸음이

올라올 때보다 훨씬 무거웠다.


배가 불러서인지,

마음이 무거워서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내가 무심한 건가.

부부 사이에서도

말하지 않으면

전혀 알 수 없는 건가.


결혼생활이란

원래 이런 건가.


언니들은

형부와 하루 종일

문자를 주고받는다던데.


곧바로 2시 회의가 있어

생각을 멈춰야 했다.


퇴근길,

남편과 주고받은 메시지를

처음부터 다시 훑어보았다.


5월 이후에도

점심시간에 나눈 메시지들이 있었다.


‘자기야, 점심 맛있게 먹어.’

‘00 빌딩 지하에 맛집 있어.’

‘팀원들이랑 가봐.’


세상 다정한 말투였다.


사실 연애할 때부터

우리는 연락에 민감한 커플은 아니었다.


내가 전화에 집착하지 않는 모습이

좋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


남편이 6개월 동안

영어학원을 다녔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은 게

거짓말일까.


나를 속인 걸까.


둘 다 아니었다.


점심시간에 영어학원에 다닌다고 해서

내가 말렸을 리도 없었다.


그런데도

왜 말하지 않았을까.


말하지 않은 걸 들켰을 때

남편은 입을 굳게 닫아버렸다.


소라처럼,

건드릴수록

자기 껍질 속으로

더 깊이 숨어버렸다.


결국 또

싸움으로 번졌다.


이런 패턴은

이후로도 수년간

반복됐다.


솔직함이

성격의 큰 축이었던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을 숨기는 사람이

나의 남편이라는 사실이.


그때 처음 알았다.


우리의 기준선은

애초부터

같은 곳에 있지 않았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