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화장>-그를 살게하는 빨간색

안성기가 아닌 오상무를 상상할 수 없다

by 윤병옥

이 영화는 김훈의 원작 소설 ‘화장’을 임권택 감독이 영화로 만든 것이다.

제목부터 이중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죽은 사람을 태우는 일인 화장과 사람을 꾸미는 일인 화장의 두 가지 뜻을 지닌다.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주인공 오상무는 화장품 회사 간부로 좋은 가장이고 좋은 회사 상사이다.

그러나 아내가 뇌종양 수술 후 수년간 요양하다가 재발하여 다시 수술을 하고 이제는 죽음을 앞두고 있다.

그는 경제적으로 넉넉하지만, 간병인도 쓰지 않고 회사일이 끝나면 병원으로 달려와 옆에서 자면서 정성껏 아내를 돌본다. 아내를 남의 손에 맡기지 않고 외동딸과 처제와 그가 돌아가면서 간호를 한다. 수술 후 아내가 잠시 집에 휴가 왔을 때에도 변이 묻은 아내의 몸을 직접 씻기며 그녀를 위로한다.

그와 아내는 젊은 시절 서로 사랑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와 분리될 수 없는 가장 가까운 가족일 뿐이다. 그녀를 미워하거나 돌보는 일이 힘들다는 생각조차 없다. 너무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삶은 회색빛이다. 죽음을 기다리는 아내를 바라보는 그의 마음은 돌덩이처럼 무겁다. 이런 마음이 신체화된 증상이, 전립선 비대증으로 인한 소변의 배출 불능이다. 마음과 몸에 무겁게 쌓인 짐들이 그를 짓누른다.

회사에 추은주라는 새로운 직원이 들어왔다. 화장품 회사답게 예쁜 여직원들도 많이 있지만 이번에는 느낌이 다르다. 옷을 화려하게 입는 것도 아닌데 그녀만 눈에 들어온다. 빨간색 립스틱이 어울리는 입술로 말하는 모습, 머리칼을 쓸어올리는 모습이 너무 아름답다. 회식 때도 그녀가 와인을 마시며 시간이 만드는 중후한 와인의 향기에 대해 이야기할 때, 자신을 언급하는 것 같아 마음이 설렌다. 영화에서는 결혼하려 했다가 파혼한 것으로 나오지만 소설에서는 결혼 후 아기를 낳고도 회사에 나오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오상무는 이때 추은주의 여성성과 생명력이 주는 아름다움에 숨이 멎을 지경이다.

결국 투병중이던 아내는 죽었다. 연결했던 심장 박동기가 멈추자 그는 슬퍼하지도 않고 조용히 딸에게 알리고 절차를 밟는다. 그리고는 병원에 가서 방광에 터질 듯이 고인 오줌을 빼낸다. 마음의 짐과 몸의 짐을 비워낸다.

장례식에 나타난 추은주는 검은 옷차림에도 불구하고 눈부시게 아름답다. (상상 장면에서는 추은주가 빨간 옷을 입고 상여 뒤에서 따라오고 있다.)

친척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오상무는 아내를 매장하지 않고 화장한다. 아내가 아끼던 개도 안락사 시킨다.

그리고는 고민하던 신제품 화장품의 컨셉을 ‘가벼움’으로 정한 다음 힘찬 발걸음을 시작한다.



이 작품을 죽어가는 아내를 두고 젊은 여자에 마음을 빼앗긴 부도덕한 중년 남자에 관한 이야기라고 한다면 넌센스다. 오상무와 추은주의 로맨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추은주는 그자체로 젊음과 생명을 내뿜는 아름다움의 상징일 뿐 아무도 유혹하지 않았고 오상무에 대한 감정도 인격적인 직장 상사에 대한 존경심 정도였다. 단지 아내의 죽음을 앞두고 무채색으로 물든 오상무의 마음에 빨간 생명의 색을 일깨우는 뮤즈였을 뿐이다. 아내의 병으로 억눌렸던 젊은 시절의 에너지-그것이 욕망이든 야망이든-가 갇혀있던 방이 존재한다는 것을 일깨운 스위치의 역할을 한 것 뿐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으니 따라 죽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억지이다. 아내의 오랜 투병으로 오상무의 에너지는 고갈되었고 추은주의 등장으로 그 에너지가 아직 남아있다는 것을 확인했을 뿐, 오상무는 아내가 죽었다고 해서 추은주와 연애하지 않는다. 다만 남은 생을 가볍게 다시 시작할 뿐이다.

이영화는 칼라 버전과 흑백버전이 있는데 칼라 버전을 추천한다. 흑백은 오상무의 암울한 삶을 보여주는데는 적합했지만 추은주의 매력과 빨간색 이미지를 보여주지는 못했다. 여배우 김규리는 끼를 부리지 않아도 그자체로 생명력있는 여성의 아름다움을 너무도 잘 보여주었다. 상여를 따라가는 검은 상복의 가족들과 대비해서 빨간색 원피스를 입은 추은주의 모습은 삶과 죽음의 대비 그 자체였다. 또한 오상무를 연기한 안성기의 외모와 표정은 일품이어서 그가 아닌 다른 배우가 오상무를 연기하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었다. 대배우의 눈빛과 주름은 영화에 깊이를 준다.



프로이드는 인간의 마음을 셋으로 나누었다. 자아와 초자아와 이드이다. 이중에 이드는 리비도-성적인 에너지-가 지배하는 영역이다. 자아와 초자아는 어쩌면 인간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발달했다고 한다면 이드는 태어날 때부터 생물로서 가지고 있었던 본연의 영역이라고 할수 있다. 이드는 도덕의 영역 밖에 있다. 따라서 오상무가 추은주라는 젊은 여성에 대해 상상하고 욕망하는 것에 대해 부도덕하다고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오상무는 남편으로 상사로 좋은 생활을 한 것으로 보아 자아와 초자아에 충실한 삶을 살아왔다. 그러나 아내의 병으로 진정한 삶의 에너지인 리비도를 너무 오래 억압하여 균형이 맞지 않았다. 한 여성의 등장으로 그것을 깨달은 이 남성의 미래는 활기찬 삶이 될 것이다.

융의 관점으로 보면 남성의 마음에 여성성-아니마-이 존재한다. 아마도 젊은 시절 사랑한 아내가 오상무의 아니마상에 근접할 것이다. 그러니 아내가 죽어간다는 것은 그의 여성성에도 위험이 닥친 것이다. 그의 마음의 균형은 심하게 파괴되었다. 이시점에 등장한 추은주는 사라져가던 아니마의 부활을 예고한다. 현실의 아내가 사라졌지만 회복한 마음속의 여성성이 그의 삶에 에너지를 줄 것이다.

오상무는 마음이 성숙한 사람인 것 같다. 보통 병든 아내 때문에 자신의 리비도를 억압한 남성은 바람을 피운다. 다른말로 미숙한 아니마를 가진 남성은 외부여성에게 마음속 아니마를 투사해서 현실적 사랑에 빠진다. 중년 남자들이 쉽게 가정을 버리고 젊은 여자와 바람이 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오상무는 마음과 현실을 분리할 줄 안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추은주라는 특정한 여성이 아니라 마음의 회복이라는 것을 아는 지혜로운 남성이다. 추은주는 단지 아직도 그에게 에너지가 있다는 것을, 아니마가 존재한다는 것을 일깨운 존재이다.

아내의 죽음으로 과도한 억압에서 벗어나고 건강한 아니마를 다시 찾은 오상무는 가볍게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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