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은교>-예술가의 영원한 뮤즈

창조의 원천 은교

by 윤병옥

자신이 객관적으로 얼마나 늙었는지 스스로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래서 모임에서 동년배 친구를 보았을 때 그들이 자신보다 늙어 보인다고 생각하고, 누군가 불시에 찍어준 자신의 사진을 볼 때 평소에 생각하던 모습이 아니어서 깜짝 놀라게 된다. 누구나 늙어도 스스로에 대한 이미지는 자기가 젊을 때의 모습이다. 사람은 나이 들어도 자신의 30대 초반쯤의 이미지를 마음속에 가지고 산다. 영화 ‘이제 그만 끝낼까 해’의 주인공처럼 자기는 평생 똑같은데 시간이 자신을 스쳐 지나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소설과 영화 ‘은교’의 주인공 이적요도 마찬가지이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적요는 교과서에까지 그의 시가 수록될 정도로 훌륭한 시를 많이 발표하여 ‘국민 시인’으로 일컬어질 만큼 존경받는 원로 문인이다. 서울에서 떨어진 근교의 주택에 은거하며 아무도 접촉하지 않고 글을 쓰며 살고 있다. 그의 생활을 돌보는 제자 서지우는 원래는 공대생이었으나 대학교 교양수업에서 시 강의를 이적요 교수로부터 들은 이후 그의 제자가 되어 문학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최근에 발표한 장편 소설 ‘심장’은 반응이 좋아서 출판기념회에서 그는 연예인급 인기를 누리고 있다.

어느 날, 이적요와 서지우는 외출에서 돌아왔다가 동네에 사는 여고생 은교가 마당에 무심히 들어와 흔들의자에 기대어 잠들어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서지우는 외부의 접촉을 꺼리는 스승의 식사, 빨래, 청소 등 모든 뒷바라지를 다 해오던 중 바빠진 일정과 작업 때문에 그 일이 어려워지자 은교를 생각해내고 스승에게 그녀에게 도우미 아르바이트를 받도록 제안한다.

이후 이적요의 일상에 은교가 들어오게 된다. 딱 붙는 교복에 짧은 치마를 입고 무방비로 활짝 웃으며 집안일을 하는 은교가 집에 들어오자 그는 안 하던 집 정리를 돕고, 앉아서 하는 걸레질 대신 간편한 대걸레 청소포를 그녀에게 내민다. 평소에는 식사로 밥을 고집하던 그가 은교가 만든 샌드위치를 맛있게 먹는다. 은교와 서지우는 서로 자기가 선생님을 더 잘 안다고 말다툼을 하기도 한다. 셋이 뒷동산에 산책을 갔을 때 서지우는 실수로 은교의 거울을 떨어뜨리고 새것으로 사주겠다고 하지만 은교는 엄마의 선물이었다며 울고, 이적요는 위험을 무릅쓰고 비탈을 내려가서 그것을 주워주니 그녀는 감동하여 이적요를 포옹한다. 그녀는 보답하는 차원으로 그에게 자신의 가슴에 있는 헤나 문신을 선생에게도 해주겠다고 제안한다. 문신을 하기 위해 숙인 그녀의 옷 사이로 아직 발달하지 않은 작은 가슴이 보이고 그는 정신이 아득해진다. 까치발을 하고 허리를 드러내며 뿌연 거실의 유리창을 닦는 은교의 모습도 눈부시다. 그의 꿈에서 은교가 나타나서 서로를 안고 사랑하는데 꿈에서 이적요는 젊은 시절이어서 피부도 팽팽하고 달리기도 잘한다.

이적요가 은교에게 호감을 보이며 생기가 돌자 서지우는 은교에게 선생을 유혹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그녀와 다투다가 이적요의 원고를 넣어둔 반다지를 열게 된다. 그 안에는 이적요가 최근 작업한 원고인 ‘나의 영원한 처녀, 은교’라는 작품이 들어있었다. 단숨에 작품을 읽어본 서지우는 숨이 막힐 정도로 생생한 표현이 아름다운 작품을 들고 자신의 이름으로 문학동네에 투고한다. 그리고 그 작품으로 이상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다.

그 사실을 모르던 이적요는 어느 날 출판사 사장에게 우연히 ‘은교’라는 서지우의 작품이 발표되고 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그 잡지를 사 가지고 집에 돌아와서 읽어보니 바로 자신의 작품이다. 스승을 방문하러 온 서지우는 너무 아름다운 작품을 반닫이 속에 썩게 둘 수는 없어서 그랬다고 변명한다. 어차피 소설가란 남의 이야기와 이름을 훔쳐 쓰는 사람 아니냐며, 소설 ‘심장’도 고상한 시인이 쓰기에는 너무 통속적이라 제자의 이름으로 발표한 거 아니냐고 따진다. 또한 스승의 이름으로 소설‘은교’를 발표하면 늙은 이적요와 여고생 은교의 관계는 더러운 스캔들이 되어 국민 시인의 얼굴에 먹칠을 할 것이라고 도발한다.

분노한 이적요는 서지우를 내쫓으며 그가 문학적 재능도 없고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하면서 은교도 더 이상 집에 들이지 않는다. 마당에 있던 잡지를 가지고 돌아간 은교는 그것을 읽고 자신에 대해 서지우가 소설을 썼다고 생각하고 그에게 호감을 갖는다.

몇 달 후 이적요의 생일에 은교가 케이크를 들고 찾아오고 서지우도 와서 셋은 생일을 축하한다. 서지우는 술이 취해 쓰러지고 은교는 이적요에게 인사를 하고 집을 떠나지만 몰래 다시 돌아와서 서지우와 은교는 지하 서재로 가서 관계를 맺는데 문소리를 듣고 밖으로 나온 이적요는 이 장면을 창을 통해 훔쳐본다. 작품에 이어 실제 은교까지 빼앗겼다고 생각하여 질투심과 분노에 사로잡힌 이적요는 자신의 원고를 다 불태우고 제자의 차 타이어를 펑크내고 자신의 차를 고장 내서 서지우를 죽이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나 막상 다음날 일어난 서지우가 스승의 차를 타고 가니 이적요가 놀라 따라가며 만류하는데 이를 이상하게 여긴 서지우가 정비소에 들러 차를 고치지만 스승이 자신을 죽이려고 시도했다는 사실에 절망하여 난폭운전을 하다가 사고로 죽게 된다.

시간이 흘러 이적요는 모든 활동을 접고 술만 먹어서 병이 들어 누워있고, 은교는 대학생이 되어 이적요를 찾아와서, 소설을 자세히 읽어보니 둘만 알고 있는 분위기를 묘사한 것으로 보아 소설은 선생님이 쓴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하고는, 자신을 아름답게 묘사해주어 고맙다고 하며 작별을 고한다.



이 작품의 주요 인물은 셋이다.

먼저, 이적요는 나이가 있지만 여전히 창작열이 있는 작가이다. 인정을 받은 시 이외에도 인간의 여러 층위의 감정을 묘사하는 소설도 집필하지만 고상한 작가라는 타이틀을 해칠까 봐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하지 못한다. 은교라는 소녀가 등장하자 또 다른 영감을 받고 ‘은교’라는 소설을 단숨에 쓴다. 자신의 신체적인 노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여전히 젊음을 동경한다.

다음, 서지우는 문학적 감각이 별로 없는 공대생 출신의 제자이다. 스승을 존경하고 자신의 무능력과 미숙함에 대해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자신의 작품으로는 세상의 인정을 받을 수 없지만 오랫동안 스승의 뒷바라지를 해온 덕분에 이적요가 쓴 소설 ‘심장’을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해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며 유명해진다. 스승의 관심이 은교로 옮아가자 질투심에 작품과 사람을 다 빼앗아간다. 그러나 스승이 자신을 버리려고 하자 절망하여 죽게 된다.

마지막으로, 은교는 갑자기 이적요에게 나타난 아름다운 존재이다. 그녀는 이적요의 감정이 살아나게 만들고 엄청난 속도로 창작을 하게 만든다.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가까운 스승과 제자의 사이에서 혼란을 느끼지만 두 사람을 다 좋아하며 작품이 탄생할 수 있게 해 준다.

이 작품을 ‘롤리타’ 종류의 노인의 이상한 로맨스로 본다면 너무 단순하게 해석하는 것이다. 이적요는 실제로 은교와 현실적인 연애를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꿈에서 사랑하는 장면은 환상인데, 꿈이나 환상도 도덕적이어야 한다고 비난을 한다면 예술에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은교의 등장은 이적요의 젊은 자아를 불러내고 활성화시켜서 작품을 창작하게 하는 뮤즈의 역할이다.

이적요는 자신의 노화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따라서 서지우가 탐탁하지 않고 정신적으로도 미성숙하다고 생각하지만 젊고 에너지가 많은 제자를 옆에 둔다.

또한 이적요는 페르소나가 너무 강한 사람이다. ‘국민시인’이라는 페르소나 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쓴 작품 ‘심장’을 자기 이름으로 발표하지도 못한다.

제자의 이름으로 그것을 발표하는 것을 보면 서지우는 이적요의 그림자이고 불안정할때 튀어나와 제2의 자아역할을 한다.

‘은교’라는 작품도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영역의 작품이었기 때문에 제자의 말대로 세간의 평판에 신경 쓰는 스승은 그것을 발표하지 못했을 것이다. 서지우가 가져다가 발표하지 않았다면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작품인 것이다.

은교는 이렇듯 서로 가까우면서도 미워하는 두 사람을 연결하는 존재이다.

심리학적으로 보면, 이적요와 서지우는 같은 인물의 양면이다. 서지우는 이적요의 그림자로 성숙한 이적요의 마음 안에 있는 미숙하지만 에너지가 넘치는 부분이다. 그는 이적요의 젊은 시절을 소환시키기기도 한다. 아마 이적요도 젊었을 때는 소화하지도 못한 남의 생각을 빌려다 글로 써서 발표했을거라고 짐작할 수있다.노화를 편안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적요의 그림자인 서지우는 모든 일을 수행하고 그의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은교의 등장으로 이적요는 서지우와 자신은 다르다는 것을 자각한다. 자신은 이미 늙은 것이다. 분열되었던 자아가 통합하려면 어느 하나가 사라져야 하는데 현실의 늙은 자아로 돌아온다는 것은 젊은 그림자가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고 영화에서는 서지우가 교통사고로 죽는 것으로 표현된다. 물론 언젠가는 남은 자아도 소멸하니까 병이 들은 늙은 이적요도 결국 죽음을 받아들인다.

은교는 이적요의 뮤즈이자 아니마이다. 늘 거기에 있었겠지만 거의 활동을 하지 않던 마음의 아니마가 은교의 등장으로 활성화된다. 그녀는 늙은 예술가의 감각을 깨우고 잠들었던 관능을 깨운다. 세상이 다시 돌아가기 시작하고 시인은 또다시 노래하고 싶어진다. 아니마는 그에게 숨을 불어넣어 글을 쓰게 만든다.

그러나 그것을 불러온 자아는 현재의 자아가 아니라 젊은 날의 그림자이다. 그것을 깨달은 이적요는 그림자를 제거한 후 현재로 돌아오고, 급격히 늙어 소멸한다.

이작품은 '국민시인'이라는 페르소나를 가진 작가의 내면에 있는 그림자와 아니마를 주변 인물들에 투사하여 인상적인 스토리를 끌어낸다.

은교는 화에서 실제 인물로, 작가의 마음속 아니마로, 소설속 캐릭터로 세 층위에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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