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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병옥 Jan 01. 2024

나이가 '들다'

2024년을 맞으며

    

새해가 밝았다.

나는 나이가 들었다.

나이가 ‘많아진다’, 나이를 ‘먹는다’ 보다는 나이가 ‘든다’는 말이 좋다.

철도 들고, 간도 들고, 단풍도 들고, 봉숭아 물도 든다.

이 단어는 갑자기 달라지는 상태가 아니라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이루어지는 변화를 의미해서 성숙의 의미를 내포한다.


젊은 시절에 나를 괴롭히던 일들도 이제는 차분히 바라보는 것을 보면, 어릴 때의 나와는 확실히 달라졌다. 물론 직업과 육아와 집안 대소사에서 자유로워져서 나의 시간이 많아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세상을 보는 눈이 깊어졌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반면에 체력은 확실히 떨어졌다. 12월 내내 감기로 고생을 해서 좋은 상태로 새해를 맞지 못했다. 그러나 신체적인 능력이 줄어서 일의 처리 속도가 느려진 것도 사실이지만, 일을 빨리하는 것에 의미를 두지 않기 때문에 느긋하게 처리하고, 서두르지 않으니 젊을 때처럼 많이 실수하지 않는것 같다.


어릴 때와 젊을 때는 자기 능력을 발전시키고 펼치는 데 힘을 쓸 때이다. 많이 배우고 빨리 시도하고 성취하는 시기이다

중년이 오면 속도를 늦추고 내부로 관심을 돌려 인생의 의미를 생각해야 할 이다. 돌아와 거울 앞에 서야할 시기이다.

노년에는 에너지를 안으로 모아 자신을 바라보고 온전한 자기를 만나야 한다는 게 내가 공부해 온 심층심리학의 목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문학 작품에 나온 캐릭터 중 가장 나의 관심을 끄는 인물은 헤세의 ‘데미안’에 나오는 에바 부인이다.

‘데미안’은 헤세가 싱클레어라는 가명으로 1인칭 독백형식으로 쓴 너무나 유명한 책이다. 어릴 때는 주인공이 미숙한 청소년에서 성인으로 어떻게 성장하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읽었던 책이다. 심리학적으로 보면 데미안이라는 불가사의한 인물은 헤세의 내면에 존재하는 종합적인 중심 가치인 '자기'라고 볼 수 있다. 그의 어머니 에바 부인도 궁극적으로 헤세에게 여성적인 힘을 주는 존재인 '아니마'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은 온전히 자기가 되는 순간 '신성'을 경험한다"라는 것이 주제이니, 책은 싱클레어가 데미안임을 깨닫는 과정을 천천히 보여준다.

 

예전에 그 책을 읽을 때 작품에서 에바 부인에 대한 묘사가 매우 신비하게 느껴졌었다. 헤세는 에바부인이 시간과 무관한 영혼의 얼굴을 하고 있고, 선과 악이 공존하고 남성도 여성도 아닌 표정을 한 존재라고 한다.

그때는 이것이 그저 문학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나이가 들고 주변을 보니 좋아하는 작가나 위인들의 얼굴에서 이와 비슷한 이미지를 느낄 때가 있다. 아름답지만 강인하고,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얼굴과 복잡하고 중성적인 표정과 깊은 눈빛을 가지고 있는 여성들이 실제로 있다. 또한 마초적인 단순함에서 벗어나 깊은 눈빛을 지니고 부드러움을 겸비한 지성을 가진 남성들도 다. 오랫동안 내면을 성찰한, 단순하게 착하기만 한 것은 아닌, 반대의 성까지 포함한, 모든 것의 균형을 이루고 있는 얼굴들이다.

     

아직은 노년의 초입이지만 나도 이제는 온전한 자기를 만나는 여정에 들어섰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내면을 살피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면, 마음속에 들어있많은 것을 느끼고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여성적인 면, 남성적인 면, 선한 면, 어두운 면 등등을 꾸준히 찾고 인정한다면 언젠가는 진정한 자기를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젊은 시절의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나를 좋게 꾸미고 내세우던 미숙한 존재였다면, 나이 든 이제는 글을 통해서 그림자와 아니무스와 본연의 자기를 드러낼 때이.

에바 부인처럼 때로는 어머니 같고, 때로는 남자 같고, 때로는 어둡게, 깊은 눈빛으로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싶다.

새해에 나이 든 내가 원하는 것은, 돈도 미모도 명예도 아닌, 인생의 의미를 아우르는 지혜와 글을 쓸 수 있는 건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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