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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병옥 Sep 30. 2024

버킷리스트를 체크하다

긴 여름이 끝났다

    

끝날 것 같지 않았던 2024년 여름이 지나갔다. 예년에는 8월 중순이면 시원해지던 날씨가 9월 중순쯤에야 더위가 꺾였으니 한달이나 늦게 가을이 온것이다.

유난히 더위를 타는 나는, 이번 여름을 어떻게 버텼는지 모를 정도로 힘들었다. 마침 미국에 있던 작은 아들도 쉬러 집에 와서 온 가족이 각자 방을 썼고 에어컨을 트는 바람에 사상 최고치의 전기료 폭탄도 맞았다. 예년에 비해 한 달이나 늦게 맞은 가을이기는 하지만, 지구가 자전축이 기울어진 채로 태양의 주위를 공전하니 복사 에너지가 적어지는 시점이 반드시 오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을 인간이 편하자고 에너지를 많이 쓰는 바람에 온실 효과로 여러 가지 교란이 오는 것뿐이다.

    

인생을 계절에 비유하고는 하는데 젊음의 상징인 여름이 길어지는 것을 잘 표현한 영화가 ‘500일의 썸머’이다. 1년이 365일인데 여름을 500일로 표현한 것은 남자 주인공이 젊은 날의 사랑과 이별의 시간을 얼마나 힘들게 극복했나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 시간들을 지나니 차분하고 시원한 가을이 왔다.

그러나 요즘 이상 기온으로 가을은 짧아지고 겨울이 바로 닥치는 것처럼, 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중년을 건너뛰고 노년을 맞이한 느낌이다. 아무리 막으려고 해도 계절이 반드시 바뀌는 것처럼 사람도 아무리 발버둥 쳐도 늙어간다. 젊을 때는 넘치는 것이 시간이라 지금 못해도 언제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미룬 것이 한둘이 아니다. 또 싫은 것도 나중에는 좋은 시절이 오리라 생각해서 참고 했던 일들도 많았다.

그러나 가을도 아닌 겨울에 접어든 나의 인생에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영화 제목에서나 보고 막연하게 여겼던 ‘버킷리스트’라는 단어가 절박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젊을 때 우스갯소리로 “비행기 1등석 타는 게 버킷리스트다.” 등등의 농담을 한 적도 있지만 버킷리스트란 죽음을 염두에 두고 인생에서 꼭 해보고 싶은 것을 의미하는데,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것들이 거기에 포함될 것 같지는 않다. 영화 ‘버킷리스트’에서도 백만장자 잭 니콜슨이 마지막에 한 것은 딸과의 화해였다. 가족들을 위해 평생을 일만 해온 모건 프리먼은 호화관광이 아닌 장엄한 자연의 광경을 보는 것이 버킷리스트 1번이었다. 영화는 시한부 판정을 받은 두 남자가 인생을 돌아보는 스토리였고 그때는 내가 젊었을 때라 그 상황에 감정이입하기는 어려웠다. 오히려 뉴스에서 본, 갑자기 비행기가 추락하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작은 쪽지에 남긴 메시지가 공감하기  쉬웠었다. 그러나 이제는 시한부 환자의 상황도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된 것 같다. 꼭 병이 걸리지 않았어도 노년은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은 시기이고 언제라도 죽음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운동을 싫어한다. 그래도 과거에는 젊음이 나의 운동 부족을 메꿨었다. 이제는 몸의 여기저기에서 신호가 온다. 그래서 운동을 꼭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자유주의자들은 자기 몸에 대한 자유가 있다며 망칠 권리를 옹호하기도 하지만 돈이 엄청 많은 것도 아니고 나중에 자식들이 부담을 지게 되는 상황을 만든다면 그것은 무책임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혹시 돈이 많다고 해도 돈은 많은데 비서와 간병인에게 둘러싸여 헬리콥터와 휠체어를 타고  구경 다니는 인생보다는, 돈은 적당히 있고 자기 발로 산에 걸어와서 자연을 감상하는 인생 쪽을 선택하고 싶다.

그래서 고른 운동이 탁구이다. 운동 감각이 떨어지니 수년을 쳤는데도 그다지 수준 높은 탁구를 치지는 못한다. 그러나 아주 재미가 있어서 의무가 아니라 즐겁게 운동을 할 수 있었다.


버킷리스트 생각을 하며 죽음이 가까워지면 무엇을 후회하고 무엇이 아쉬울까 상상을 해보았다. 나를 발전시키기 위해 애썼던 청년 시절과, 직장생활과, 결혼 후 인생에서 해야 할 과업인 출산과 자녀 양육과 부모님 케어의 의무를 성실히 마치고 맞은 지금의 황금 시간을 허투루 보낸다면 후회가 될 것 같았다.

나의 최초의 버킷리스트는 음악을 좋아하니 '악기 하나를 제대로 연주하는 것'이었고, 오랜 기간 열심히 플룻 연주를 배웠었다. 그러나 건강이 나빠지고 천식이 생기니 입으로 부는 악기는 무리가 되었다. 한번의 호흡으로 노래의 한 마디를 지속할 수 없게 되면서 결국 그만두게 되었다. 실패했지만, 배우는 동안 즐거웠고 좋은 친구도 만났으니 시작도 하지 않았다면 아쉬움이 더 많이 남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다음은 기왕 하는 재미있는 탁구를 대충 치지 말고 잘 배워서 멋진 기술을 구사하고 싶어서  '탁구 잘 치기'를 버킷리스트로 정했다. 물론 그렇다고 열심히 한다고해도 이 나이에 부수를 향상시키거나 대회에서 명성을 떨치지는 못할 것이다. 그저 내가 만족하는 탁구 스타일을 만들고 싶을 뿐이다.

그래서 다시 개인 레슨을 받는다. 문화센터에서 어울려 치는 탁구는 너무 즐겁지만 공을 받아넘기는데 급급해서 기술이 향상된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개인 레슨으로 교정한 자세와 기술로 문화센터에 가서 친다면 더 멋지게 탁구를 칠 수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경제 활동도 안 하는 시기에 돈을 쓰는 것이 살짝 마음에 걸렸지만, 노년내과 정희원 교수의 말처럼 "지금 건강에 투자하는 돈은 나중에 누워서 쓰는 치료비에 비하면 새발의 피"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더 늙으면 돈이 아무리 많아도 할 수 없는 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을 앞으로 돌려서 침대에서 마지막을 맞을 때를 상상해 본다. 몇 가지 회한은 남겠지만 가족들과 친구들을 사랑했고, 열심히 책 보고 영화 보고 글을 썼으며, 노년에도 나를 향상하려고 노력했던 자신을 뒤돌아보며 나의 생에 감사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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