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병옥 Oct 12. 2023

가늘고 길게 살기로 했다

지속가능한 방식

굵고 짧게 산 사람

고등학교 시절, 대학 입시 때문에 모두들 공부를 열심히 했던 시기였다.

나는 그때도 별로 몸이 튼튼하지 못해서 남들처럼 잠자는 시간을 줄여서 공부할 수가 없었다. 집안 형편이 여유롭지도 않은데 엄마가 학원을 보내주겠다고 했지만 한 달 나가보고는 포기했다. 학교 수업 끝나고, 학원에 가서 다시 공부하고 집에 돌아갔더니 너무 피곤해서 학교에서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고 배운 내용을 소화할 시간도 없어졌던 것이다.

다시 학교 수업 후 독서실에 가서 수업내용과 참고서를 가지고 공부하고, 7시간씩 잠을 자는 나름의 방식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다가 딱 한 번, 집에서 수학 문제를 푸는데 너무 재미가 있어서 밤을 새운 적이 있었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고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하다 보니 새벽이 왔고 그 순간 감격스러웠었다. 그러나 순간의 기쁨이었을 뿐, 그날 낮의 컨디션은 당연히 안 좋았고, 결국 지독한 감기에 걸려서 일주일을 공부도 못하고 그냥 날렸다. 고3때 피같은 일주일을 날리게 되니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때 얻은 교훈은 “네 한계를 알고 까불지 마라”였다.

     

성인이 된 후에도 마찬가지로 조금 무리하면 몸이 신호를 보내고 그것을 무시하면 대가를 치렀다. 이제는 내 주제를 아니 무리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형편상 어쩔 수 없이 일을 몰아서 하면 예외 없이 두 배의 시간을 회복에 바쳐야 한다.

결혼 후 명절은 여자들에게는 엄청난 노동을 요구하는 때이다. 나의 경우도 지난 몇십 년의 추석을 돌아보면 추석 전에는 장보기와 음식 만드느라 바쁘고, 추석 당일에는 음식 가지고 큰집에 가서 차례 지낸 다음 시골에 성묘 갔다가 저녁때 집에 돌아오고, 다음날 친정에 음식 싸가지고 가서 연로한 부모님 상 차려드리고, 그다음 날은 다시 시댁 제사가 있는 날이라 가서 일해야 했다. 그러고 나면 몸살이 나거나 한 일주일쯤은 넋이 나가서 멍하니 지냈다.

    

세월이 변하니 제사도 많이 줄게 되어 추석 다다음날 제사를 다른 제사에 합하며 없애고, 남자들이 미리 벌초하고 성묘하게 되어 추석날 시골도 가지 않게 되고, 부모님도 돌아가셔서 친정에도 가지 않게 되었다. 차례에 참석하는 가족들의 수도 줄어서 준비할 음식의 양과 설거지도 줄게 되니 이렇게 편한 추석을 맞이하는 게 어색할 정도가 되었다.

그래서 이번 추석에 생긴 여유 시간을 집에서 원 없이 영화 보고 글 쓰며 지냈다. 미리 만들어 놓은 음식과 큰집에서 싸 온 음식 덕분에 평소보다 식사 준비도 쉬워서 시간이 여유로웠다. 문제는 허리가 안좋은 상태에서 편하지  않은 책상과 의자에 무리해서 너무 오래 앉아 있었던 것이다. 자주 일어나서 스트레칭도 하고 밖에서 산책도 했어야 했는데 그냥 오래 앉아있었더니 결국 또 허리가 탈이 났다. 할머니 자세처럼 허리가 똑바로 펴지지도 않고 한번 굽히면 자력으로 일어날 수도 없게 되었다. 내내 고생하다가 연휴가 끝나자마자 정형외과에 가서 치료도 받고 약도 먹었는데 잘 낫지를 않는다. 과거의 레슨을 잊은 대가다.

      

천재들의 인생을 보면, 엄청난 재능에다가 그만큼의 몰입으로 대단한 업적을 이룬다. 그러나 한편 그들의 평균 수명은 짧았던 것 같다. 그야말로 굵고 짧은 인생이다. 오래 산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대단한 업적을 이루기는 했지만, 모차르트나 이상 같은 천재들은 너무 일찍 세상을 떴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한사람이 일생동안 쓸 수 있는 에너지는 한정 되어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그 에너지를 어떤 사람은 몰아서 굵고 짧게, 어떤 사람은 나누어서 가늘고 길게 쓰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왜 이렇게 재능도 없고 게으를까 자책하면서 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나 같은 보통 사람은 황새를 좇으려다 화를 입기 일쑤이다. 재능도 없고 체력도 없으면서 흉내만 낸다고 그들 같이 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무리하면 더 많은 시간을 까먹으니 오히려 비경제적이기 까지 하다.

요리하고 운동하고 영화보며 게으르게 지내다가, 가끔씩 반짝 글쓰고 살기로 결심하다시 레슨을 상기한다.

"가늘고 길게 살아라"

그래야 지속 가능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전동 휠체어를 탄 할머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