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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병옥 Dec 27. 2022

빨래를 하며 새해를 맞는다

나선형으로 흐르는 시간

    

중년을 넘어가면 젊을 때보다 시간이 빨리 가서 시간을 도둑맞는 느낌에 초조해지지만, 새해를 맞을 때마다 캘린더를 바꾸면서 새로운 각오도 다지고 노트도 새로 장만하며 다시 시작할 수 있음에 안도한다. 아무런 내용도 쓰여있지 않은 새 탁상 달력을 보며 새해에는 거기에 어떤 내용들이 채워질까 생각하게 된다.

     

새해는 이해인 수녀님의 시처럼 빨래를 하며 지난해에 옷에 묻혔던 때를 씻어버리고 깨끗한 옷을 입고 시작하고 싶다.

새 옷은 아니지만 깨끗이 세탁하고 손질한 옷을 입는 느낌은 상쾌할 것이다. 입을 때 말리면서  더해진 뽀송한 햇볕 냄새가 느껴지고 올올이 옷감의 조직이 살아서 기분 좋은 빳빳한 촉감이 느껴질 것이다.

땀에 젖은 머리를 감고 잘 손질한 느낌으로도 시작하고 싶다. 손으로 머리칼을 쓸어 올렸을 때 나는 샴푸의 허브 냄새와 새로운 시간의 바람에 응답하듯 흩날리는 머릿결이 기분 좋을 것이다.

종교가 있다면 천주교에서 신부님께 고백 성사를 하거나, 일요일에 교회에 가서 기도를 하거나, 절에 가서 마음을 비우는 것도 깨끗한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는 새로운 출발에 의미를 줄 것이다.

한번 더러워진 것들이 영원히 깨끗해지지 않으면 정말 큰 일인데, 빨아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음에 안도하고 감사한다. 희미한 얼룩은 남지만 큰 오점은 반성하면서 씻어낼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지난해에 묻혔던 땟국물이 떠내려가는 것을 보며 생각에 잠긴다.

그렇다고 완전한 회복은 아니다. 세탁한다 해도 새 옷 같이 돌아오지는 않고, 봄이 온다고 해서 사람이 다시 젊어지지는 않으니 말이다. 최악의 경우 그 사람에게 다시는 봄이 돌아오지 않기도 한다.


역사의 진행처럼 개인의 시간도 순환하면서 동시에 앞으로 나사처럼 전진하는데, 순환 고리는 의미 있는 경험이 만드는 선이다. 노년으로 갈수록 경험의 내용이 빈곤해지니 순환 고리가 아진다. 결국 늘인 고리의 길이가 질적인 시간의 양이다. 전체 모양은 고동 같은 원뿔형의 나선 모양일 것이다. 그러니 개인의 삶의 깊이에 따라 100살까지 산다고 해도 질적으로는 단명일 수도 있고, 위인이나 성인들은 짧게 사는 것 같아도 질적으로 길고 충만한 삶을 사는 것이다.

또한 10대의 1년과 60대의 1년은 같은 길이의 시간이 아니다. 뇌과학으로 볼 때 나이에 따라 뇌의 반응 속도가 다르다고 하는데, 비유하자면 어린 시절은 반응 속도가 빠른 고속 카메라로 찍은 슬로비디오여서 시간은 천천히 가고, 노년은 반응 속도가 느린 저속 카메라로 찍은 단축 비디오여서 시간의 흐름은 너무 다르게  빨리 간다. 그러니 어릴 때는 그리도 가지 않던 시간이 나이 들어 쏜살같이 지나가는 것이다.

한편 치매 노인의 고리는 심지어 앞으로 나아가지도 않는다. 짧은 무한루프를 돌며 현재를 반복하거나, 오히려 방향을 거꾸로 돌려 젊은 시절로 역행하기도 한다.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이 직선이기만 한다면 노력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누구도 200년을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의 진행이 나선형이라면 노력해서 나선의 지름을 늘릴 수는 있다. 위인이나 성인들처럼 나선을 무한대로 키울 수는 없겠지만 의미를 찾으려 노력한다면 한계 내에서 반경을 넓히는 좋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시간이 직선으로만 흐르지 않아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조건 젊은 시절로 돌아가려는 노년의 시도는 성숙하지 않아 보인다. 치매와는 다르지만 인간의 성숙에 거스르는 역행이기 때문이다.

요즈음 세태는 대부분 좋은 외모를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청년들 못지않은 외모에 대한 열정을 가진 노인들이 종종 있어서 보기가 거북할 때도 있다. 동안 성형을 하고 긴 머리에 미니스커트를 입은 할머니나, 지나치게 근육 만드는데 신경 쓰는 할아버지를 보면 젊은이들과 육체적으로 경쟁하는 것 같아 슬프다. 생의 주기를 이해한다면 젊은이들의 외모나 에너지와 경쟁할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성숙할 때까지의 시간이 준 지혜로 다음 세대에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선에서 어느 위치에 왔나 생각해본다. 순환 고리가 너무 짧아지지는 않았나 걱정해본다.

문제는 장수가 아니라 시간의 질이 좋은 인생이다.

빨래를 하며 조용히 다가올 시간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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