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녀와의 옹알이 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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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녀가 태어난 지 100일이 가까워지자 옹알이가 장난이 아니다.
내가 눈을 맞추며 호응을 하면 아기가 몇십 분 동안 다양한 표정과 소리로 화답을 한다. 지인들에게 이 이야기를 했을 때 그들은 내가 이제 거짓말쟁이 할머니가 다 됐다고 웃었다. 그러나 약간의 시간적인 과장이 있었을지는 몰라도 아기가 나를 보며 옹알이할 때 구체적인 의미는 아니어도 감성적인 반응을 한 것은 확실하다.
어른들 사이의 대화는 내용이 확실하고 페르소나를 장착하고 예의를 차린 것일 때가 많다. 사회에서 업무로 만난 사이는 대화에 감정이 배제되는 것이 기본이고, 사랑하는 연인들이나 가족 간에도 이 감정이 완전히 진실한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상대가 나의 조건 때문에 나를 좋아하는 척하는 것이 아닐까 의심이 들기도 한다. 따라서 백만장자 부모나 애인은 상대방의 반응이 순수한 사랑인지 가짜인지 확신할 수 없어서 100% 행복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돈 없는 사람의 자기 위안이다. 하하.)
아기는 아직 의식과 무의식의 분화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니 자신을 돌봐주는 어른들에게 가식적으로 좋아하는 척을 할 수는 없다. 그러니 아기가 누구를 보고 웃을 때는 진짜 좋아서 웃는 것이고 이때 어른들은 열광하게 된다. 아기가 자신을 보고 좋아할 때는 그 순수한 호감 때문에 울컥하게 된다. 아기가 배고프다고 울 때나, 졸리다고 또는 기저귀를 갈아달라고 보챌 때처럼, 누구를 보고 웃는 것이 그들의 솔직한 표현인 것을 알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자식보다 손주가 더 예쁘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많이 들었다.
어떤 면에서는 맞는 말이다. 젊은 시절에 아직 결혼 생활도 적응이 안 되고, 직장과 가사를 병행하는 것도 어설프고, 아이를 출산하고 몸은 안 좋고, 아이는 잘 키워야겠다는 강박까지 있고, 해야 할 일만 너무 많아서 아이와 순수하게 교감하기가 쉽지 않다. 나의 경우 연년생 아이들을 먹이고 돌보는 일에 바빠서 아이를 예뻐할 시간이 없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그러다가 나이 들어 손녀를 보니, 신경 쓰이는 일은 며느리가 하고 나는 그 일을 조금 거들며 사랑을 주고 예뻐하기만 하면 된다. 며느리가 아기의 발달 단계에 맞는 운동을 시키고 알맞은 장난감을 고르느라 고민할 때 나는 그저 아기를 안고 어화둥둥 얼러주고 아기가 웃으면 행복할 뿐이다.
그러나 마음을 더 깊게 들여다보면, 나는 자식을 더 생각한다.
딸이 낳은 손주를 돌보던 친구들의 솔직한 이야기를 들어봐도 딸이 우선이라고 한다. 밤에 아기가 안 자면 아기 걱정도 하지만, 딸이 못 자는 것에 더 마음 쓰인다고 한다. 나도 일차적으로 손녀가 예쁘지만, 아기의 얼굴 속에서 아들이 보인다. 유전적으로 외모도 닮고 성격도 닮은 손녀를 통해 아들을 느낀다.
손녀의 옹알이에 끝없이 대화하는 것은, 시간을 거슬러 그때 다른 일 하느라 홀로 눕혀놓았던 자식들에게 말을 건네는 것과 마찬가지다. 자식들이 어렸을 때 바빴던 엄마가 그들에게 제대로 감성적인 대화를 하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을 손주를 통해 건넨다. 인생에서 한 번 뿐이었던 아기 시절에 그들과도 이렇게 놀아주고 싶었다는 마음을 손주와 놀며 표현하는 것이다.
어린 시절에 자식들에게 주고 싶었으나 현실적으로 혼자 연년생을 키우면서 불가능했던 사랑의 표현을 손주에게 한다. 손녀를 사랑하고 안아주며 그들에게도 이렇게 해주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옛날로 돌아가 어린 자식들과 얼굴을 맞대고 그들의 옹알이 이야기를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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