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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병옥 Jun 27. 2022

영화<그남자는 거기 없었다>-드디어 미로에서 탈출하다

현대인에 대한 블랙 코미디

     

이발소에서 잘려서 쓰레기통으로 사라져 가는 머리카락이나, 내뿜어 흩어져가는 담배 연기처럼 존재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남자는 자기가 실제로는 거기 없는 마치 유령과도 같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가 끝도 없는 미로를 헤매다가 탈출하려고 마음먹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슬프기도 하고 우습기도 한 블랙 코미디 속으로 코엔 형제가 우리를 초대한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에드의 인생에서 계획이란 없다.

모든 일이 어쩌다가 그렇게 된 것일 뿐이다. 도리스와 결혼한 것도, 이발사가 된 것도 어쩌다가 일어난 일일 뿐이다.

아내인 도리스는 백화점 경리를 맡고 있는데 무기력한 남편에 실망하고 사장인 데이브의 박력과 과거 군대 시절 무용담에 감탄하며 그와 바람을 피우고 있다.

미로를 헤매는 것 같은 생활을 하던 에드에게, 이발소에 온 손님 클레이튼은 미래의 세탁 방식이라며 드라이클리닝 사업에 관하여 떠벌린다. 자발적으로는 아무 일도 하지 않던 에드에게 최초로 찾아온 신선한 도발이었다.

사업자금 1만 불을 마련해야만 하는 시점에서, 에드는 아내와 불륜관계인 백화점 사장 빅 데이브에게 돈을 주지 않으면 그의 아내에게 불륜을 폭로하겠다고 익명으로 협박 편지를 써서 돈을 받아낸다. 그러나 사업에 어수룩한 에드는 그 돈을 법적인 계약서도 받지 않고 클레이튼에게 넘긴다.

데이브는 백화점 실소유주인 아내에게 들킬까 무서워서 돈을 마련하느라 경리인 도리스와 담합하여 회삿돈을 횡령하고, 도리스와의 밀회 때 마주친 클레이튼을 협박범이라 의심하며 그를 찾아가 폭행하며 추궁한다. 그로부터 에드가 돈을 가져와서 투자했음을 자백받는다. 데이브는 자신이 때려서 죽인 클레이튼을 차에 태운 채 물에 빠뜨리고 에드를 부른다. 둘은 몸싸움을 하고 데이브가 에드의 목을 조르자 에드가 근처에 있던 칼을 집어 데이브를 찔러 죽이는 사고가 발생한다.


다음날 이발소에 출근한 그에게 경찰이 찾아오고 범행이 밝혀졌다고 생각하고 순순히 따라가려 하는데 뜻밖에 살인 용의자가 자신이 아닌 아내 도리스라고 한다. 백화점 경리 장부를 확인하니 그녀가 돈을 횡령했고 그것을 숨기려고 살인을 했다는 것이다. 이발소 사장인 처남은 은행에 가게를 저당 잡혀서 아내에게 최고의 변호사 프레디를 구해준다.

이 과정에서 에드는 자신이 데이브를 죽였다고 말하지만 유능한 변호사 프레디의 전략은 누가 죽였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데이브가 얼마나 신뢰할 수 없는 인물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라며 탐정을 고용해서 데이브의 뒷조사를 한다. 그가 과거에 걸핏하면 남을 폭행했고 군대 시절 적군과 한 번도 싸우지 않은 사무직이어서 그가 말한 무용담이 모두 허풍이었다는 것을 알아낸다. 도리스는 데이브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에서 남편이 자신의 불륜을 이미 알고 실망했었고, 데이브는 사실 비겁한 건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절망한다. 재판 날 도리스는 나오지 않는다. 구치소에서 자살해 버린 것이다.

    

한편, 동네 변호사와 상담하던 에드는 그의 청순한 딸 버디가 피아노 치는 모습을 보고 그녀의 이미지를 마음에 간직한다. 가끔씩 그의 집에 들러 그녀의 피아노 연주를 듣는 것이 그의 낙이 되었고 에드는 그녀의 재능을 키워주는 매니저가 되고 싶다는 생각으로 유명한 선생에게 버디를 데려간다. 그러나 피아노 선생은 그녀가 음악성이 없고 손가락은 잘 돌아가니 좋은 타이피스트가 될 거라며 빈정거린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버디는 뜻밖에, 자기한테 잘해주어서 고맙다며 그를 기쁘게 해 주겠다고 애무하려 하고 놀란 에드는 차 사고를 일으킨다.


병원에서 깨어난 에드에게 경찰이 찾아와 그가 드라이클리닝 사업가 클레이튼의 살인 용의자라고 알려준다. 클레이튼의 차가 물속에서 발견되었는데 그는 무지막지하게 폭행당한 채 죽어 있었고 그의 가방 안에 에드와의 사업 계약서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집을 저당 잡혀 다시 프레디를 고용하고 변호사는 전략을 짠다. 그는 에드가 누구를 죽였는지는 관심도 없다. 그의 변론의 전략은 도리스는 남편에게 충실한 좋은 여자였고, 에드는 배심원들과 마찬가지로 무슨 일을 저지를 의지도 없는 한심한 이발사에 불과한 현대인 그 자체라는 것이었다. 화려한 변론으로 배심원을 설득하여 거의 이길뻔한 순간에, 누나의 불륜을 모르는 처남이 재판정에서 흥분하며, 누나에 비하여 형편없다고 생각되는 매형인 에드를 폭행하고 그 바람에 재판은 연기된다. 더 이상 비싼 변호사인 프레디에게 비용을 댈 수 없었던 에드에게 다른 변호인이 오고 그 변호사는 하지도 않은 에드의 범행을 인정하고 선처를 바라지만 판사는 사형을 언도한다.

사형을 앞두고 에드는 자신의 삶을 정리한다. 남은 시간이 결정되자 그에게 서로 상관없어 보이던 낱낱의 사건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보이기 시작한다.

그는 두려움 없이 침착하게 전기의자에 앉는다.


         



아무 일도 자발적으로 하지 않고, 아무도 보지 못하는 유령처럼 살던 에드가 스스로 유일하게 선택한 일은 두 가지로, 첫째는 원하지도 않는 이발사를 그만두고 미래에 유망하다는 드라이클리닝 사업에 뛰어드는 것이고 두 번째는 순수한 소녀 버디를 피아니스트로 키우는 일이었다.


그러나 평온한 세계에 의지를 개입시키니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연쇄적으로 발생한다. 이것들은 겉잡을 수없이 커지고 결국 파국을 불러온다.

-에드는 사업자금을 마련하려 데이브에게 돈을 뜯어내려다 의도치 않게 살인을 하게 되었고, 그 일로 아내 도리스가 대신 살인 혐의를 받게 된다.

-유능한 변호사 프레디 덕분에 아내가 무죄가 될 수 있었는데 도리스는 데이브의 정체를 알고 자살해 버린다.

-순수한 여성의 상징인 버디를 성장시키려고 노력하다가 그녀가 사실은 타락한 소녀였음을 알게 된다.

-물속의 시체 클레이튼의 가방 속에서 자신이 챙기지 않은 계약서가 발견되는 바람에 살인 용의자가 된다.

-유리한 재판 상황에서, 처남은 자기 누나는 착한데 매형은 쓰레기라고 생각하고 흥분하여 난동을 부리는 바람에 재판이 중단되고 결국 에드는 사형선고를 받는다.

-결국 에드는 자신이 저지른 일은 피하고 저지르지 않은 일로 사형당한다.

    

영화에서 유능한 변호사 프레디는 ‘불확정성의 원리’에 대해 계속 이야기한다.

이것은 원래 과학자 하이젠베르크가 알아낸 물리학의 원리인데, 그 내용은 전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특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즉, 전자의 위치를 관찰하려면 빛이 필요한데 상대적으로 에너지가 큰 저 파장의 빛이 있어야 하고 그때 빛의 광자가 전자와 충돌하여 전자의 속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거시적인 세계에서는 빛을 쏜다고 해서 물체가 움직이지는 않지만 양자의 세계에서는 입자가 작으니 광자와 부딪쳐 튕기기 때문이다.

이 내용을 변호사 프레디는 인간사에 적용한다. 관찰하는 행위 자체가 본질을 바꿔버릴 수 있어서 애초에 진실을 알아낼 수 없다는 것이다. 서로 다른 관찰자는 각각의 다른 진실을 말할 수도 있다는 진실의 상대성을 말하는 것같이 들린다. 물론 여기서는 물리학의 법칙을 물질이 아닌 인간사에 적용하는 것 자체가 프레디의 궤변을 합리화하는 수단일 뿐이다.

하지만 감독은 에드가 시작한 일이 의도와는 달리 흘러가며 뜻밖의 결과를 가져오는 것에 대한 비유로 인간이 마치 원자와도 같이 무의미하게 존재하다가 외부의 자극으로 튕겨져 나가는 것을 물리학 법칙으로 빗대어 표현한다.

     

아무 생각 없이 살던 에드는 버디와 함께 자동차 사고가 났을 때 시간의 흐름이 느려지며 도리스와의 지난 세월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경험을 한다. 그녀와 만나고, 결혼하고, 일상을 보냈던 시간들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이제는 잠자리도 같이하지 않는 부부지만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의 배신 때문에 상처받았음을 깨닫는다.

또한 그는 감옥에서 사형집행을 기다리며 남아있는 짧은 유한한 시간 속에서 이 모든 독립적으로 보이는 각각의 사건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나를 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인생이라는 무의미한 미로 속 여행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길은 죽음뿐이라고 생각하며 도리스가 기다리고 있는 저세상을 향해 담담하게 떠난다.

     

끝에서 주인공이 억울하게 죽는다고 해서 비극은 아닐 것이다.

만일 에드가 처남의 말썽이 없어서 재판에서 무죄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가 실제 저지른 살인에서도 무죄는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예전과 같이 아무런 일탈도 하지 않고 지내서 아무 일도 안 났다 하더라도 그것이 해피 엔딩은 아니다. 아무런 존재감 없이 아무 성찰도 하지 않고 오래 산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어차피 잘려 버릴 머리카락이 계속 자라는 것처럼, 성찰하지 않는 인간들이 일상을 무의미하게 보내고 있다. 죽은 후에도 머리카락이 자라는 것을 보면 아무 생각 없이 일상을 보내는 것이 살아있다는 것의 증명이 되지는 못한다. 이발소에서 에드가 잘린 머리카락을 쓰레기통에 버리듯, 세상은 그냥저냥 살던 에드를 사형시켜 없애 버린다. 그는 있으나 마나 한 사람이다. 그 남자는 거기 없는 것이다.  


결국 이 영화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현대인의 상징으로 에드를 보여주고, 생각 없이 살다가 갑자기 어떤 일을 한다고 해도 자신의 의도와는 다른 결과를 얻는 존재의 허무함을 코엔식 유머로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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