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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형 Feb 28. 2022

추억

2022. 02. 13.

어제 쓴 내용을 보니 여러 각도에서 보는 불꽃을 비유적으로 썼는데, 이와이 슌지의 [쏘아올린 불꽃, 밑에서 볼까? 옆에서 볼까?]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뜯어볼수록 더 생기를 찾는 영화여서 그것을 처음 봤을 때의 울림이 여전히 내 안에 잔존하는지도 모른다. 가슴 설레는 유년기 첫사랑의 추억을 재현했다는 식으로 뭉개버려선 안 되는 영화다. 폴 토마스 앤더슨과 이와이 슌지는 어쩌면 같은 사태에 대해 서로 약간의 시차를 두고 접근한 것처럼 보인다. 이와이 슌지의 영화에서 아이들이 품는 의문을 내 나름으로 번역하자면 이렇다.


우리를 둘러싸고 육박하는 이 추억의 시공간을 납작하게 본다는 건 가능한 일일까?


영화 속은 비디오 게임의 태동기다. 화면 속 디지털의 플랫이 너희를 위해 전혀 다른 세상을 준비했다고 아이들에게 손짓하는 시대다. 그 세상에 들어가서, 그 세상의 눈을 통해 바라보면 달의 뒷면도 보일 것만 같다. 내가 그 뒷면에 영원히 안착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추억은 뚜렷한 목적을 가진 선택지들로 이루어진 게임 속 필드가 될 것이다. 거기서는 과거의 단순화와 함께 책임도 제거된다. 아이들이 아무리 이입해서 무찌른다고 해도 다시 게임을 켜면 '쿠파'는 멀쩡히 되살아나고 '마리오'는 오래된 승리를 준비한다. 평면은 그런 것이다. 모든 것이 언제나 다시 시작할 수 있고, 사실상 거대한 정지 상태에 있으며, 평면을 운영하고 거기에 쓰일 에너지를 만드느라 제 에너지를 소진하는 얼굴 없는 사람들로부터 동떨어져 있는, 어떤 대안적 삶.


영화가 처음 방영된 TV 드라마 시리즈 [IF 만약에]의 제작진이 이와이 슌지의 내용 전개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는 얘기는 그런 맥락에서 흥미롭다. 제작진은 완전히 평행하며 동등한 위상을 지니는 두 가능세계가 있기를 바랐다. 낭만화한 디지털 세계가 그러하듯 드라마의 가능세계에선 미추와 선악과 삶의 행불행이 자유롭게 가면을 바꿔 쓰며, 그 과정에 사람은 아무것도 실제로 지불하지 않는다(고 믿어진다). 이와이 슌지의 방식은 그 전제에 정면으로 맞선다. "내가 이겼더라면......" 이후 펼쳐지는 이야기에서 노리미치는 제 상상에 갇혀 자맥질한다. 그 자신이 유스케에 '들어갈' 수 없다는 한계 때문에 그는 나즈나에게서 "좋아한다"는 말을 끝내 못 듣는다. 마을 바깥을 잘 모른다는 한계 때문에 상상에도 한계선이 그어진다. 그렇게 IF는 명백한 IF로 남는다. 그는 이제 평생 IF를 품고 살아야 하며, "내가 이겼더라면"이라는 단서를 통해 "나는 이기지 못했다"라는 사실로 계속 되돌아갈 것이다.


쏘아올린 불꽃을 밑에서 보는 순간에 그는 앞날을 예감한다. 그는 나즈나의 상실이라는 폭발로부터 자기 마음을 방어할 수 없다. 폭발은 전방위적으로 폭발이고, 추억은 납작한 하나의 각도, 하나의 가능성이 아니다. 엄밀히 말해 추억은 미래에 있는 것이다. 그가 앞으로 마음의 움푹 팬 자리에 넣어 다닐 열등한 가짜 세계야말로 추억이고, 추억은 가짜여야만 힘을 발휘한다. 이 영화의 믿기 힘들 정도로 탁월한 설정 중 하나는 아이들의 연령이 제각각이라는 것이다(규모가 작은 시골 학교이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아이들에겐 연령이란 팩터 자체가 지워져 있는 듯하다. 이질감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건 노리미치의 상상 속에서다. 나즈나는 몇 살일까. 일할 수 있는 어른이란 몇 살쯤 되는 걸까. 무질서한 그의 연령 감각 탓에, 나즈나의 연령에 대한 그녀 자신의 이해마저도 관객에게는 엉뚱하게 보인다. 처음으로 노리미치는 낯섦에 부딪힌다. 튕겨나온다. 그는 나즈나의 욕망이나 내력은커녕 나즈나를 유형화할 방법도 모른다. 상상에서조차 그는 타인에 빙의해 완벽한 꼭두각시 놀이를 할 수 없다.


플랫을 유영하는 익명의 가능태. 그런 사람은 될 수 없다. 그는 자기 버전의 실패담을 질질 끌며 살아가야 한다.


더크 디글러의 이야기 또한 성장담이라면 동시에 실패담이어야 한다. 비디오의 시대를 맞아 그는 제 몫의 비디오('팔루스')를 지급받았답니다. 그렇게 마무리되는 이야기는 없다. 매체는 늘 인간의 자기 이해에 대해 결정적인 필터인 척을 하지만, 실제로는 매체도 한 관념이고, 이준규가 썼듯이 "조금 비어 있다". 인간이 종종 형성된 대로 사고하는 것처럼 보이는 건 인간이 자신의 형성에 대해 사고하기를 멈추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소장도, 대여도 아닌 구독 시스템 안에서는 구독자의 삶도 일종의 구독 계약처럼 느껴지곤 한다. 알고리즘은 내 얼굴이 그대로 비칠 것만 같은 평면이다. 취향이라는 (그다지 신뢰할 게 아닌) 길잡이를 통해 거기에 주름을 그려보지만, 주름은 똑같은 깊이를 가진 다른 수많은 주름들, 또는 주름들의 가능성에 파묻혀, 결정적으로 평면에 녹아든다.


그러나 이해는 반드시 입체적이다. 진짜 경험이라는 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짜 경험은 반드시 발생하는 데다가 우리가 그것을 적극적으로 취해야 한다. 노리미치의 "내가 이겼더라면", 그게 바로 영화다. 영화 자체에 대해서도 우리는 마찬가지의 음각(陰刻)을 겪어야 한다. 내가 만들었다면? 내가 나 자신의 언어에 의해 스크린으로 내쫓겼다면? 그때 스크린도 자기 음지를 드러낼 것이다. 현행의 문법과 밈의 성채는 필연적으로 새롭다. 하지만 그 안에 비집고 들어가서 새로움이라는 관념을 제일 먼저 더럽힐 우리의 지리멸렬한 개별적 삶들, 즉 추억이 없다면, 새로움은 아무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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