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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형 Feb 28. 2022

성기

2022. 02. 12.

폴 토마스 앤더슨의 [부기나이트]에서 마지막 씬에 마침내 등장하는 거대한 성기는 분명 어쩔 수 없이 인상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필연적으로 축소된 성기다. 드러나기 전에 그것은 무한히 거대했다. 인간의 성장 서사란 그런 것일 터다. 우리가 어떤 역할을 가지고 공동에 참여한다는 건 자신을 깎아 드러낸다는 의미다. 미켈란젤로는 대리석에 갇힌 대상을 그대로 꺼낸다는 식으로 조각 작업을 설명했다. 수위가 낮아져 차츰 물 속의 주민이 노출되는 것처럼. 이수명의 어법을 빌리자면 대상은 '침수된 채로 떠오른다'. 영화의 배경상 작가주의적 영화의 시대에서 비디오의 시대로 넘어갈 때 벌어지는 일도 그것과 같다. 감독은 가장 거대한 극장을 상상한다. 전 우주가 주목하고 거기에 빨려드는 극장, 우주를 상영하는 극장이다. 촬영 카메라는 투명하고도 직설적인 감관이다. (작품 중반에 제 머리를 쏘는 총성과 함께 쉼표처럼 세계관의 이행을 알렸던) 카메라맨은 시종일관 포르노의 비현실성을 믿지 않았다. 아내가 남편인 나를 두고 어디서나 당당하게 다른 사람과 몸을 섞는 모습을 '보여주는' 일은 이상하다는 것, 즉 공유된 이해라는 게 가능하다고 믿었고, 제 눈에 포착된 것을 통해 보편적인 진실이 작동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진실은 모두 둘러앉아서 보는 불꽃과 같은 것으로 밝혀진다. 불꽃을 각자가 나누어 가지는 것이다. 불꽃은 단 하나의 빛이 아니라 수없이 분열된 형상들의 공존인 것이다. 영화는 자기 실체라고 믿었던 것을 잃는다. 의존해 왔던 일방적인 투영의 환상이 사라지자 영화는 새로운 하드웨어를 찾는다. 대여되거나 복제될 수 있는 비집단적인 시청 경험이 그것이다. 따라서 더크 디글러가 제 성기를 꺼내서 볼 때는 그조차 자기 것을 처음 보는 셈이다. 그도 이해하게 된 바 성기는 누구나 하나씩(어쩌면 더 많이) 갖고 다니는 이미지이다. 처음으로 그는 자의식에 상시 상영되는 빅뱅으로서의 성기가 아닌 개인화한 도구로서의 성기를 만난다. 시간이 허락하는 한 그는 재발견을 거듭할 것이다. 가령 구독의 시대에 그는 성기를 또 어떻게 식민지로 만들 것인가. 덧붙일 말이 더 있지만 시간이 늦었으니 지금은 여기까지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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