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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형 Mar 27. 2022

좋은 시는 왜 좋을까 - 4

김승일

김승일 시인이 카프카에게서 인용하여 시의 제목으로 삼았다는 어느 구절에 따르면, "펜은 심장의 지진계"입니다. 이 비유를 통해 시 쓰기에 대해 추측할 수 있는 사실이 두 가지 있습니다. ① 시 쓰기는 패턴을 기록하는 일이다. ② 시 쓰기는 전체를 드러내는 일이다. 풀어서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시는 유발되는 정서나 어감이 풍요로운 말을 골라서 나열하는 예술 형식이 아닙니다. 시는 듣기 좋은 메시지를 뽑아내어 선전하는 형식도 아닙니다. 시에 나타난 사유는 패턴화한 사유입니다. 마찬가지로 시에 등장한 세계도 어떤 패턴이 관통하는 세계 전체입니다. 지진계가 지진의 파형을 예쁘게 그려내고자 조작하는 기계가 아닌 것처럼요. 물론 사람이 기계라면 그는 고장 난 기계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자기 오작동까지를 '패턴'에 적절히 반영해야 합니다. 시 쓰는 사람의 일 중 그 부분이 가장 고됩니다. 그리고 김승일 시인은 그걸 매우 잘하는 사람입니다.



같은 부대 동기들


군대에서 세례를 받은 우리들. 첫 고해성사를 마치고 나서 운동장에 앉아 수다를 떨었다.

난 이런 죄를 고백했는데, 넌 무슨 죄를 고백했니? 너한텐 신부님이 뭐라 그랬어? 서로에게 고백을 하고 놀았다.


우린 아직 이병이니까. 별로 그렇게 죄진 게 없어. 우리가 일병이 되면 죄가 조금 다양해질까? 우리가 상병이 되면...... 고백할 게 많아지겠지? 앞으로 들어올 후임들한테, 무슨 죄를 지을지 계획하면서. 우리는 정신없이 웃고 까분다.


웃고 까부는 건 다 좋은데. 성사를 장난으로 생각하진 마. 우리가 방금 나눈 대화도 다음 성사 때 고백해야 돼. 어렸을 때 세례를 받은 동기가 조심스럽게 충고를 하고.

역시 독실한 종교인은 남다르구나. 너는 오늘 무슨 죄를 고백했는데? 우리는 조금 빈정거렸다.


나는 생각으로 지은 죄도 고백하거든. 대부분 끔찍한 것들이라서. 알려줄 수는 없을 것 같아.

팔다리를 잡고 간지럼을 태웠는데도. 너는 절대 고백을 하지 않았고. 그래서 우리는 겁이 났다. 저 독실한 신자 녀석이. 끔찍한 생각을 하고 있어서.    



긴말이 필요 없는 재미있는 작품입니다. 지금 군 복무 중인 많은 이들이 쉽게 공감할 정황입니다. 시 속의 인물들은 훈련소에 있는 것 같습니다. 동기끼리 천주교 행사에 참여했나 봅니다. 거기서 세례를 받고 고해성사까지 했군요. 신부에게 각자의 죄를 고백했습니다. 이들이 하는 말은 하나같이 현실감이 넘칩니다. 다 맞는 말 아닙니까. 계급이 오르면 무린 더 다양한 죄를 짓게 되겠지. 더 많은 권한이 생기니까. 무슨 죄를 지을지 미리 계획하자! 그때 한 친구가 진지하게 말합니다. 지금 이런 이야기, 신을 끌어내리는 이야기도 죄야. 약이 오른 친구들은, 야 너는 얼마나 잘났니, 너의 죄를 고하라, 괴롭힙니다. 하지만 이 독실한 친구는 절대로 말을 안 합니다. 생각으로 얼마나 끔찍한 죄를 저지른 거지? 이 선하고 믿음 깊은 친구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문득 읽는 사람에게도 공포심이 차오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인간의 마음의 어둠이 얼마나 깊습니까. 다 같이 웃고 까부는 와중에도,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내 자리에 와서 앉아 있습니다. 끔찍한 것이.



눈물의 방


무중력 상태에서는 눈물과 오줌이 공중을 날아다닌다 물방울이 기계 속으로 들어가면

기계가 망가진다


그래서


눈물의 방이 필요한 것이다 사람들이 언제 울지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눈물의 방에서 살아가야 한다


눈물의 방은 피난선에서

가장 큰 방이고


화장실이다


그렇다면 물방울의 방이지만 아무도 물방울의 방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사람들은 배출하고 청소기는 빨아들인다


피난선은 그 자체로 피난소라서 피난소를 찾고 있는 피난소였다

사람들은 눈물의 방에서 썩은 물이 된다


혼자 남은 피난민은 고향과 가족을 잃은 사람이다 혼자 남은 피난민은

함께 살던 피난민도 모두 잃었다


외로운 피난민은 어제 죽은 피난민을 청소기로 빨아들였다

피와 뼈가 바깥으로 배출되었다


그가 조타실의 문을 두드렸을 때 문이 열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는 선장도 잃은 것이다 선장을 빨아들이러 가기 위해서

그는 문을 때리기 시작한다 눈물의 방의 문이다       



역시 이야기의 힘이 느껴지는 시입니다. 피난민들이 우주선에서 살아갑니다. 그 다음은 모두 거기에 뒤따를 법한 이야기입니다. 눈물이 기계에 들어가면 기계가 망가지므로 지정된 장소에서 울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갑자기 뚜렷한 이유 없이도 울 수 있는 동물이니까. 눈물의 방에 그들은 갇혀 살아갑니다. 물론 사람 몸에서 나오는 물이 눈물만은 아닙니다. 화장실은 온갖 종류의 물이 모이는 곳이고, 그곳에 다른 이름을 붙이자면 "물방울의 방"이 맞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눈물의 방"이라고만 부롭니다. 왜일까요? 아마 피난민들은 눈물을 흘리고 싶은 모양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런 상태임을 계속 인지하고 싶은 모양입니다. 그렇군요. 이것이 인간이군요. 물을 쏟으면서, 쏟아지는 물을 통제하면서 살다가, 어느 날 썩은 물이 되어 광막한 우주 공간에 배출되는 것. 시의 전개란 이런 것입니다. 시는 비논리가 아니라 비틀린 논리이며, 어떤 현실성을 끝까지 밀고 가면 도달하는 이상한 현실을 그려내는 것입니다.


피난민들은 새 고향과 새 가족을 찾지 못합니다. 한 사람씩 죽고, 배출되고, 마침내 "선장"마저 죽습니다. 어서 그를 배출해야 합니다. 시체의 물이 기계를 망가뜨릴 테니까요. 그러나 그가 있는 방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은 분리가 인간의 삶을 지배합니다. 우리는 쫓겨나고, 떠돌아다니고, 출입을 거부당하는 존재입니다. 눈물의 방은 끊임없이 멀어집니다. 처음에는 우주선, 다음에는 우주선의 어떤 방, 다음에는 우주선을 다음 장소로 이끄는 장소인 조타실. 진짜 눈물의 방은 어디입니까? 그곳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받는 위협을 해소하려고 만든 가상의 장소입니다. 기계적인 삶 속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삶 자체입니다. 살아 있기에 우리는 슬픕니다. 눈물이 흐릅니다. 살아 있기에 우리는 찌꺼기를 배출합니다. 취급 주의 딱지가 붙은 생명의 그런 거추장스러운 측면을, 우리는 적절한 도구("청소기")를 통해 바깥으로 쫓아내야 합니다. 삶을 망가뜨리지 않으려면 말입니다. 인간은 그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고통받습니다. 마음 놓고 울고 싶어서, 인간은 실제로는 없는 눈물의 방을 만들고 그 문을 계속 두드립니다.


여담으로 이런 생각도 해볼 수 있습니다. 시 속의 "외로운 피난민"을 '시인'으로 생각한다면? 또 끝나지 않는 피난을 그의 삶으로, 청소 행위를 시 쓰기로 본다면, 그의 출입을 거부하는 조타실은 뭘 나타내는 것입니까? 그곳에서 죽었다는 선장은 어떤 존재일까요? 각자 상상해보시면 재밌겠습니다. 시는 상징도 알레고리도 아니고, 해석되어야 할 암호문 같은 것도 아니라지만, 좋은 시는 숨구멍이 잘 뚫려 있어서 종종 이런 접근을 받아들입니다. 항간엔 (매우 설득력 있는) 이런 말도 있으니까요. 모든 시는 결국 시 쓰기에 대한 시다.



인기생물


터미는 이제 인기동물이 아니다 너무 자주 사람 흉내를 낸다

시간이 지나고 터미가 죽는다 시간이 확확 간다

사람들이 동물에 대한 책을 읽는다 거기 터미가 기록되어 있다 그 식육목 곰과 생물이 사람을 흉내 내고 사람을 구했다고 한다 터미의 기록을 읽은 사람들에게 터미는 다시 인기 동물이다

터미를 모티브로 삼은 캐릭터는 그 애니메이션에서 꽤 인기가

높아서 점점 비중이 더 높아지고 있다


그 캐릭터의 이름은 머미터미다

머미터미는 이제 인기 캐릭터가 아니다 당연히 인기생물도 아니다 너무 사춘기 소년처럼 행동한다

그러나 그러한 캐릭터도 누군가의 최애캐로 자리 잡는다


생명 공학자가 머미터미라는 생명체를 만든다

머미터미는 이제 인기동물이다 이 인기동물은 자신의 원본인 인기 캐릭터처럼 사춘기 소년 같다

하지만 아직은 인기동물이다 머미터미를 하나 구입하고 싶다

그러나 이 시대에는 돈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우리는 그냥 공학자에게 하나만 더 만들어달라고 부탁을 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머미터미를 돈으로 구입하고 싶다


돈이라는 것은 나의 최애캐였다 그렇지만 동물이었던 적은 없다 물론 시간과 조건이 맞으면 돈도 동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 터미라는 과거의 동물이 인간처럼 행동하는 동영상이라는 제목의 동영상을 시청한다

그때의 인간들은 저런 행동을 인간처럼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나는 터미가 마음에 든다 오늘부터 터미도 내 최애캐다

돈과 터미 돈과 터미 내가 공학자라면


돈터미를 만들 것이다      



말라르메가 드가에게 했다는 말이 떠오릅니다. 시는 관념으로 쓰는 게 아니라 낱말로 쓰는 것이라는 말. 시에 있어 언어란 단순한 도구가 아닙니다. 시는 언제나 언어 자체에 대한 사유와, 언어를 향한 시 쓰는 자의 입장 설정을 자기 안에 품습니다. 말은 세계와 어긋납니다. 그래서 말을 이해하면 세계를 안정화된 환상으로서만이 아니라 그 어긋남에 이르기까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적어도 시인은 그런 기대를 지닌 사람인 것 같습니다). 말을 둘러싼 자유로운 상상력은 세계도 둘러쌉니다. 과거와 미래도 둘러쌉니다. 머미터미라는 동물이 사람들의 생활 깊숙이 들어온 가상의 평행세계도 예외는 아닙니다. 거기서도 시는 작동합니다. 세계의 어떤 부분이 자꾸 시 흉내를 내기 때문입니다.


이 시에 진입하려면 머미(mummy)와 더미(dummy) 두 단어의 인솔을 받아야 합니다. 머미터미가 바로 그들의 결합체니까요. 머미는 죽은 자를 마치 죽지 않은 듯 기술적으로 보존한 것, 즉 미이라를 뜻합니다. 더미는 사람을 대신하여 사람처럼 활용되는 모조품-사람입니다. 둘의 공통점은 생명체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정말 생명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머미가 사람이 아니라면 어째서 사람들은 머미를 그토록 필사적으로 만들고 또 보호할까요. 더미가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더미가 사람을 잠깐이나마 대신할 수 있었을까요. 머미와 더미에게 주어진 생명은 그들의 심장이나 뇌 또는 영혼의 상자 속에 있는 게 아닙니다. 그들과 관계 맺는 사람들의 삶의 양상이야말로 그들의 생명입니다. 사람들이 머미와 더미를 받아들이고, 배제하고, 합체시키고, "머미터미가 나의 최애캐"라는 정보를 공유할 때, 그 "인기"의 형태로만 머미터미의 생명은 있습니다. 실체가 없다고 해서 이 세상에 없는 게 아니듯 사람이 아니라고 해서 사회에 없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 흉내를 내는 사람, 사람 같은 것이 지속됩니다.


시에서는 바로 그 "인간처럼" ~함이 끝까지 의심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사람 흉내를 내는 동물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 동물은 사람의 유일무이함에 대한 자기 확신을 위협합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일관되

게 적용 가능한 사람다움은 없습니다. 심지어 사람 흉내를 내는 동물에 대한 혐오조차 너무 쉽게 와해됩니다. 머미터미는 누군가의 최애캐(가장 사랑하는 캐릭터)가 됩니다. 머미터미는 훗날 생명공학자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머미터미는 복제 가능한 생명입니다. 그렇다면 이 인공 머미터미는 머미머미터미, 더미머미터미이기도 합니다. 머미터미의 영구한 흔적이고 머미터미의 대체품인 머미터미입니다. 그것은 여전히 사람 흉내를 잘 내는 동물이고, 기록에 의하면 마치 사람처럼 다른 사람을 죽음에서 구해내기도 하는 동물이므로, 머미머미머미터미 또는 더미더미머미터미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계속할 수 있습니다. 인간 또한 흉내내어진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인간사의 완벽한 흉내입니다.


이제 화자는 역사를 끌어들입니다. 그가 사랑하던 옛 버전의 머미터미를 떠올립니다. 화자 자신을 흉내내던 머미터미. 그 머미터미의 이름은 돈입니다. 그가 "시간과 조건이 맞으면 돈도 동물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할 때, 그 말은 마르크스가 '물신성'으로 규정한 어떤 사회적 성질을 정확히 지시합니다. 돈이 없는 세상에서 우리는 돈에서 해방될 것만 같습니다. 무엇을 돈을 주고 사고 싶다는 생각을 다신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욕망은 인간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 욕망을 통해 맺는 여러 사회적 관계들을 통해서만 우리는 인간일 수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돈은, 아닌 게 아니라 동물입니다. 그 동물의 이름은 인간입니다. 그 동물의 이름은 또한 머미터미입니다. 인간은 돈의 머미터미입니다. 돈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돈이 존재하지 않는" 시대에 머미터미가 돈 흉내를 냅니다. 인간은 머미터미의 최애캐입니다. 인간 말고 무엇을 흉내내겠느냐고 그는 묻습니다. 불가피하게, 인간은 자기 최애캐의 머미터미입니다.


어떤 종류의 첨단을 상상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발달된 공학 기술도 머미터미를 '넘어서게' 해주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단지 발달된 머미터미 생산술로 나아갑니다. 발달도 발달을 흉내내는 셈입니다. '나'는 돈에 대한 시대의 욕망을 흉내냅니다. 이제 분명해진 바 "돈터미"는 돈더미입니다. 돈더미는 돈-더미입니다. 돈이라는 관념이 그러하듯, 많은 돈에 대한 관념도 정말로 많은 무엇을 가리키는 말은 아닙니다. 많아진 돈은 돈을 흉내낸 어떤 것의 집합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너무나도 사랑해서 그것은 정말로 많이 살아 있게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 사회의 누군가가 정말로 생기 있어 보인다면...... 최애캐라면...... 사랑받는다면, 이제 사랑이 흉내내는 것은 무엇? 시는 계속 이런 말을 합니다. 절망은 이처럼 정확해지기 전에는 절망조차 아니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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