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음악 영화 카테고리를 살펴보다가 안 것인데, 힙합 음악가들의 전기 및 다큐멘터리(축성된 형태의 셀프캠)가 상당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 다큐멘터리 형식은 힙합의 새로운 식민지다. 모 전과자의 회고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인기 넷플릭스 시리즈에선 이를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한다. "Orange is the new black."
이상하게도 내가 아직 도쿄에 한번도 가본 적 없다는 사실이 요즘 더욱 이상하게 느껴진다. 누구에게나 이 세상에 한 곳씩 이미 가봤어야 마땅한 곳이 있다. 그런 곳들의 특징은 갈 때가 되면 그곳에 가게 되어 있으므로 그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아키하바라 얘기는 아니다. 거기에 가서 뭘 해야 할지 생각하면 몽중몽이 될 뿐이다. 돌아보면 나는 동시대적인 기반에서 자란 오타쿠가 아니었고(주로 남들이 다 핥고 간 유물을 붙잡고 이것 참 신기하게도 내가 아는 누구를 닮은 얼굴인데 중얼거리는 역할), 면피 목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엄격한 의미에서 오타쿠가 결코 아니었다는 생각마저 자주 한다. 도쿄에 간다면 우선 메구로, 미나토, 키치죠지? 써놓고 보면 항상 다 부촌이다. 그 다음에는 북해도에나 가야 할 것이다. 거기에서는 또 오카야마 어느 골목에 몰아친다는 청바지의 푸른 파도를 머릿속에 그릴 것이다. 다음번에는 꼭 가야지. 여기가 아닌 어딘가...... 자우림이 아닌 언젠가로 도대체 우리는 언제 갈 수 있을까? 사실 한번도 그렇게 좋아해본 적은 없다.
쓰던 소설은 완성했다. 원고지로 오백 매 정도가 나왔다. 학생 때는 보통 이렇게 소설을 다 썼다고 말하면 좋아, 이제 퇴고를 하면 되겠다고 말하면서 누군가가 축하를 해주었던 것 같다. 퇴고라니? 쓰면서 나는 퇴고를 다 하고 나오는데, 하고 나는 생각했던 것 같다. 문장들의 만남이 이동이 아니라 조금 큰 범위의 정주가 될 지경으로 계속 되돌아가니까. 물론 퇴고를 해서 글이 더 좋아질 수는 있다. 하지만 쓰는 동안에는 글을 더 좋게 만들기 위해서 퇴고를 한 게 아니다. 글이 있게 하려고 퇴고를 한 것이다. 교만한 마음으로 하는 말이 아니야, 하고 나는 누군가를 설득해보려고 했던 것 같다. 만약 이 말이 교만하게 들린다면 그건 이 말이 형성되는 조건에 어떤 함정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야. 무슨 함정? 여기까지는 물어본 사람이 없다. 그 대신에 어디의 누구에게선지 그 질문을 이미 받은 모양으로 많은 친구들이 다음과 같은 취지의 말을 내게 일관되게 해주었던 것 같다. 함정? 그것은 글이 있기 위한 조건이야. 그러니까 퇴고를 해야 한다. 나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