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e yourself는 편법이다. 스스로에게 인정받기에 이르는 험한 길을 쉽게 건너뛴다.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작은 인정을 바깥에서 구하는 약한 마음이 자신에게도 편법을 쓰게 한다. 그보다 겸손하고 더 용감한 지침을 이미 고대인들은 신전 앞에 새겨두고 읽었다. "Know yourself". 지와 사랑이 하나이므로 두 문장은 같은 의미이다. 따라서 표현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 둘 중 무엇이든 지침으로 삼아도 된다. 문제는 그 말을 받드는 정신이다.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을 편안하게 해주는 일이 아니다. 사랑은 대상을 지운다. 사랑이 헌신이라면 그건 대상을 향한 헌신이 아니라, 나 아닌 다른 존재와 동조할 때에만 언뜻 나타나는 무언가를 향한 헌신이다. 사랑은 그것의 솟아남이다. 사랑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애쓰라는 명령이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나는 시에 대해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시는 하나가 되라는 명령이다"). 시는 어떠한 나를 출현시킨다. 나를 사랑하고 싶으니까 나를 알려고 애쓴다. 그 결과를 실패라고만 부르지 않고 시라고 불러주는 데에 핵심이 있다. 나를 알고 싶다. 그래서 아직은 나를 사랑할 수 없다. 이건 결핍 따위가 아니라 결정이다.
이미지는 Porsche의 광고다. 아무도 완벽하지 않다는 말을 Porsche는 누굴 위로하기 위해 쓰지 않았다. 반대다. 이들은 전혀 괜찮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저 광고에서 Porsche는 대중으로 하여금 Porsche를 이해할 것을 요청한다. 그건 오직 Porsche의 자기 이해를 통해서만 Porsche를 사랑하라는 요청이기도 하다. 다른 시팔저팔 것들이 아니라 정확한 욕망을 가져달라는 것이다. 그 뜻을 관철하기 위해 Porsche는 오히려 자신이 무엇이 아닌지를 똑바로 가리킨다. 당연히 가리킴의 대상은 9석에 놓인 Sauber/BMW이다. 이제 Porsche는 Porsche 아닌 것에 빨려든다. 그것에 몰입하고 헌신하고 하나 되어서 거기에서 Porsche를 본다. Porsche를 찾아 나선다. 삶이라는 극히 이례적인 사건은 바로 이 여행길을 피해 가지 않겠다는 약속을 대가로 발생했음이 틀림없다. 차를 팔아먹으려는 어느 스포츠카 브랜드의 속셈이 천박한지 어떤지는 나중의 문제다(게다가 그건 Porsche의 문제다). 우리의 태도가 그러해야 한다. 이를테면 Porsche를 처부술 때에도 우리의 태도는 그러해야 한다. 정하고 실행한다. 빛을 비추었으면 본다. 끝까지 가서 본다.
열반경에서 죽음을 앞둔 붓다는 이렇게 말한다. 자신을 섬(등불)으로 삼아 정진해라. 다른 이에게 의존하지 말라. 그러나 나 아닌 존재 없이 혼자서 어떻게 나를 이해하고 길을 밝힐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이해하기로는 이것이 붓다가 뒤이어 율법을 함께 언급하는 이유다. 그건 즉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앎을 믿고 따르라. 그것이 고뇌를 해결해주지 않는다면 그것을 버려라. 온힘을 다해 나 아닌 것과 하나가 되고 또 떨어지기를 두려워 하지 말라. 변하지 않는 것은 없으므로 매번 새롭게 알려고 애써라. 변하지 않는 것은 없으므로 어차피 너는... nobody's perfect. 그렇다고 해서 완벽하지 않은 세상의 룰과 담을 쌓고 손쉬운 자기애로 피신할 수는 없다는 얘기다. 그 동굴엔 사랑할 게 아무것도 없다. 우리에겐 각자 자신을 찾아 건네야 할 무엇이 있다. 그게 뭔지도 모르고, 자신을 찾지도 못해서 끝내 그게 뭐였는지 모르는 채로 남을 테지만, 그렇다면 우리의 모름만이 우리의 주체성이다. 나와 화해할 수 없다. 아직은. 내가 하나로 있는 한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