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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농약맛댕댕이 Mar 16. 2022

일신상의 사유로 퇴사합니다.

이 회사가 제 건강에 해롭습니다



 퇴사가 계속 미끄러지는 과정에서 불면증이 도졌고, (TMI: 나는 잠만보다. 하루 최소 8시간은 숙면하는데, 한 시간도 못 자다 보니 하루하루 미친 듯이 살이 빠졌다) 수면제 처방을 목표로 정신과를 가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의사선생님 얼굴을 보자마자 울음보가 터졌고, 익숙하게 내담자 앞에 놓인 곽티슈를 엄청 써버렸다. 선생님은 내 전후 사정을 들으시고는 신경안정제, 수면제 처방과 더불어 진단서가 필요한지 물으셨다.


생소한 진단서 (출처: Google)

진단서…?

학생 시절, 공가임을 증명하기 위해서나 떼어봤던 문서

회사에 제출하리라고는 생각해 보지 못한 문서. 

일단은 혹시 모르니 띄어놓은 진단서를 사용할 타이밍은 내 생각보다 빨리 다가왔다. 




아파서 부재했던 부서장이 돌아왔고, 난 한시 빨리 그가 내 사직서를 승인해 주기를 바랐다. 누구보다 평소에 일하기 싫은 사람 억지로 잡길 싫다고 했던 그였으니까. 그건 그도 신입사원이 나간다는 사실은 위에 불려가 잔소리를 들을법한 일이었는지, 무려 한 달이라는 사내 규정을 지키지 않으면 사직서 승인을 해주지 않겠다는 선전포고를 했다.



팀장: 회사 프로세스가 그러그러해서 원래 프로세스대로 한 달 채워줬으면 해. 못할 이유가 있나?
나: (정신과 진단서 들이밀며) 저 아파서 못합니다. 매일 못 자고 있어요. 게다가 인수인계서 완벽히 작성해서 업무에 지장이 없는데 제가 왜 퇴사를 못하죠?
팀장: 아파서 그렇다고? 너 그럼 나 개X끼 만드는 거야 신입사원이 정신과 다니는 게 얼마나 창피한 일인데, 팀장이 그것도 모를 정도였다는 거잖아. 이대로 너 퇴사하면, 난 무단 퇴사 처리할거야. (이상 생략)


 의미 없는 협박이 오갔고, 결국 한 달이 아닌 3주로 합의를 보며 내 사직서는 위로 결제가 올라갈 수 있었다. 신입사원이 정신과 진단서를 내밀었다는 말은 동네방네 퍼졌고, 난 3주 동안 병든 닭 꼴을 해가며 회사를 다니며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자격증 책을 들고 와서 공부하고, 자기소개서를 썼다. 



사직의 이유 우리 모두 밝힐 수 있나요..? (출처: Google)

 


사직서 신청 사유에 많은 말들을 적고 싶었다. ‘일신 상의 이유로 퇴사합니다.’라는 한 문장으로 내 고생을 압축시키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일신 상의 이유가 회사에 있음을 전달하고 싶었다. 사수라는 지위를 남용해 신입사원을 수족처럼 부린 그, 그러한 그를 감싸준 팀장, 신입사원의 퇴사를 일방적으로 막으려 한 인사팀장, 자신의 인맥을 활용해 신입사원을 협박한 부사장까지.



 사직서가 승인되고, 내 퇴사 날짜가 확정돼서야 난 비로소 링거 주사 없이 편안한 잠을 청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서 분위기를 흐린 신입사원을 투명인간 취급했지만, 동기들과 나의 사정을 알고 있는 몇몇 사람들을 나에게 앞으로의 미래를 응원해 주었다. 



 조그마한 밴댕이 소갈딱지 마음을 가진 나에게 첫 번째 퇴사는 역대급으로 힘들었고, 또 다른 신입사원으로 살아가고 있는 지금, 왜 그때 마음을 편하게 먹지 못했을까라는 아쉬움이 든다. 하지만 원효대사 해골물이 쉬웠다면, 그가 왜 대사겠는가. 그저 이번 기회를 통해 조금 더 무뎌졌으면, 앞으로는 태연하고 의연하게 대처하리라 마음먹는 수밖에.




* 퇴사일기는 이것으로 마무리지으려 합니다. 그동안 매거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건설사 신입사원 적응기로 돌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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